‘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Posts 김선미

  • Created at2020.08.11
  • Updated at2022.11.28

 

김복동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위안부’ 피해를 밝히는 증언자라는 사실을 넘어, 인권과 평화를 위한 거침없는 행보로 많은 이들은 그를 인권활동가, 평화활동가로 기억하고 있다. 김복동의 목소리는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그가 뿌린 평화의 씨앗은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8월 14일 기림의 날을 맞이하여 웹진 <결>은 김복동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가 겪었던 피해 사실을 열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 이후 인권·평화 활동의 궤적을 살펴 김복동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주목했다. 김복동의 곁에서 함께 싸웠던 활동가부터 그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일반 시민까지, 그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총 다섯 개의 콘텐츠로 구성된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는 김복동을 향한 우리의 기억이다.

[기림의 날 특집] 김복동을 기억하다 

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김복동 ©나눔의집

 

군인들에게 끌려 다닐 때 
나는 나를 찾지 않았어......
(중략)
나 없이 살았어, 나 없이......
눈을 떴더니 내가 예순두 살이었어. 
까만 원피스에 까만 구두를 신고 집에 돌아왔을 때가 스물두 살이었는데...
예순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

-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위안부’ 김복동 증언집/김숨 소설), 현대문학, 2018, 135페이지 

나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들을 돕고 싶습니다.

- 2012년 3월 8일(세계여성의날), 나비기금 설립 기자회견장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 평화활동가로 불렸던 김복동의 이야기이다.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스물두 살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김복동은 자신을 찾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낯선 곳에서 일본군들에게 끔찍하고 참혹한 일들을 겪으며 당시의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때의 경험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예순두 살에 ‘나’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신고하기까지 김복동은 그 긴 세월 동안 자기 자신을 애써 외면하고 또 외면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눈떠보니 예순두 살, 그때서야 자신의 삶을 마주해야겠다고 결심한 김복동은 2019년 1월 28일 93세의 나이로 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30여 년간 치열하게 과거의 삶과 마주하며 자신을 찾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던 자신의 경험을 국내외에서 담담히 전하며 폭력에 짓밟히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마음을 같이 하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계속했다. 

아시아 곳곳에서 겪은 8년간의 위안소 생활

김복동은 1926년 5월 1일 경남 양산에서 딸만 여섯인 집의 넷째로 태어났다. 1941년 김복동은 양산 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세상이 흉흉하니 집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어머니의 권유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마을마다 나이 찬 여자 아이들을 끌고 간다는 소문이 돌아서, 김복동의 세 언니는 이미 서둘러 결혼을 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열다섯 살인 김복동은 어려서 괜찮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구장과 반장이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사람과 함께 김복동의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딸을 데이신타이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데이신타이가 뭐냐고 묻는 김복동의 어머니에게 그들은 군복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며 3년만 일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김복동은 끌려갔다.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부산으로 가서 이미 도착해 있는 20명 정도의 여성들과 함께 화물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그 후 대만,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 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다. 

대만에서는 고향으로 편지를 쓰라고 해서 일본군이 불러주는 대로 적었는데, 김복동의 어머니는 그 편지를 받아보고 딸이 대만으로 끌려갔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일본군은 1939년 중국 광둥을 점령하고 위안소를 설치했다. 광둥은 일본군과 ‘위안부’가 동남아시아로 나가는 거점이 된 곳이다. 김복동 일행은 광둥에 도착하자마자 군인 트럭을 타고 위생병원 같은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일본 군의관은 옷을 강제로 벗기고 성병 검사를 했다. 그 검사가 끝난 후부터 끔찍한 위안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홍콩으로 옮겨 석 달쯤 머물렀고 그 후 싱가포르로 이동했다. 싱가포르에서는 가끔씩 산속 깊은 곳의 군부대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위안부’ 10명쯤이 함께 갔는데 군인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저녁이 되면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였다. 싱가포르에서 몇 달 머문 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로 이동했다. 김복동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잊지 않으려고 수마트라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외우고 또 외웠다. 김복동 일행은 어쩌다 쉬는 시간이라도 있으면 모여 앉아 울기만 했다. 일본이 이겨야 전쟁이 끝나고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일본이 이기기를 빌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위안소에 군인들이 오지 않았고, 보름쯤 지나자 일본 군인들이 빨간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차를 타고 와서 김복동 일행을 태우고 떠났다. 김복동 일행이 간 곳은 남방군 제10육군병원이었다. 그곳에서 김복동 일행은 간호 훈련을 받았다. 호박에다 주사 놓는 연습을 하기도 하고 병원 청소도 했다.

제16군 사령부 직할부대 제4과 남방반이 작성한 유수명부에 김복동은 1945년 8월 31일 용인(庸人)으로 이름이 실려있다. 김복동이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수마트라 소재의 위안소에 있다가 해방을 맞은 후 남방군 제10육군병원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김복동은 갑자기 군인이 오지 않게 된 지 보름쯤 지난 후 제10육군병원으로 이동했다고 정확히 기억했다. 

제10육군병원에 있던 어느 날 이종사촌 형부라는 사람이 김복동을 찾아왔다. 군속인 형부에게 김복동의 어머니가 대만에서 딸을 꼭 찾아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미군 수용소에 있던 김복동의 형부는 조선인 여자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제10육군병원까지 왔다고 했다. 형부의 도움으로 병원에 있던 김복동은 다른 조선인 여자 300명과 함께 영국군 수용소로 거처를 옮겼다. 수용소에는 중국인, 서양인 등 1,000여 명이 있었다.

1946년 김복동은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사촌오빠와 사촌언니 그리고 어머니가 김복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났다가 스물두 살이 되는 해에 돌아왔으니 8년 만이었다. 형부는 김복동이 ‘위안부’였던 것을 안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간호부 생활을 했다고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성화를 부리셔서 김복동은 어쩔 수 없이 ‘위안부’ 생활을 했던 것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통곡을 하셨지만, 재취 자리라도 가야 부모로서 마음이 놓인다며 딸에게 결혼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김복동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의 바람과 경제적인 문제로 끝이 났다. 아이도 없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그 후 김복동은 혼자 살았다. 구멍가게를 하면서 이웃도 돕고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며 생활했다. 과거의 ‘나’를 단절시킨 채 현실만 바라보며 살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텔레비전을 통해 ‘위안부’ 피해 신고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신고 전 동생에게 의논하니 동생은 조카들도 있는데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가족의 혼외 섹슈얼리티 경험, 그것도 일본 군인들에게 당한 성적 유린의 경험은 가족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수치였을 것이다. 김복동의 가족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1990년대 초반 우리 사회의 성 인식이 그랬다. 그런 우리 사회의 성 인식은 ‘위안부’ 문제가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공론화되기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김복동은 며칠을 고민하다 1992년 1월 17일에 피해 신고 전화를 했다. 그때부터 김복동은 가족들과 멀어져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신과 온전히 마주하며,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수많은 세계 시민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김복동의 목소리가 울림이 되어

그때부터 김복동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더해갔고,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김복동은 1992년 제1차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증언했다. 그리고 199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하여 증언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스위스, 영국,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일본 대만 등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촉구했다.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 원고로서 영상으로 증언하기도 했다. 법정이 열린 첫날인 12월 8일, 김복동의 사례는 ‘‘위안부’의 연행과 이송’과 관련하여 책임자 안도리키치(安藤利吉, 1944년 당시 대만총독)의 책임을 묻는 심리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김복동의 활동도 중간에 잠시 쉼이 있었다. 건강 때문이었다. 젊을 때 워낙 심하게 혹사당해서인지 김복동은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김복동은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몸을 돌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2009년 수술했던 눈의 증상이 재발하여 다시 서울 마포구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 머물며 2010년 재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인권과 평화를 위한 김복동의 행보는 계속되었다. 수요시위에 참여해 평화로운 세상 만들기를 호소하는 것은 물론, 고령의 몸을 이끌고 전 세계를 누비며 국제 활동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 촉구와 전시 성폭력 피해의 재발 방지에 대한 국제여론을 이끌어 냈다. 

김복동을 포함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러한 활동은 콩고와 우간다 등 세계 무력분쟁지역의 성폭력 생존자들을 비롯한 세계 성폭력 피해자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더 강한 목소리로 더 넓게 확산시켰다. 초국적 연대의 현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한가운데 김복동이 있었다.

2012년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함께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했다. 2012년부터 이 기금으로 매년 콩고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분쟁지역 아이들에게 장학금도 전달했다. 2013년부터는 영역을 넓혀 베트남의 전시피해자와 그 자녀들에게도 기금을 전달했다. 김복동은 본인이 어린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느라 학교 공부를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전쟁·무력 분쟁지역의 아이들은 자신처럼 살지 말고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러한 김복동의 활동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공감과 존경을 받았다. 2015년에는 국제언론단체에 의해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단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을 김복동과 함께 선정했다. 우리 정부도 평화와 인권을 위한 김복동의 노력을 인정해 2015년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2017년 11월 25일, 이날은 세계여성폭력철폐로 김복동은 정의기억재단과 100만 시민이 함께 드리는 ‘여성인권상’을 수상했다. 이때 받은 상금을 씨앗 기금으로 하여 ‘김복동 평화상’을 제정해 무력분쟁지역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전시 성폭력 철폐를 위해 활동하는 국내외활동가들과 단체를 지원한다. 이 상의 1회 수상자는 우간다 내전의 성폭력 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아칸 실비아가 선정됐다.

김복동의 관심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2011년 3월 일본 동북지역 대지진 피해자 돕기 모금을 제안하고 1호로 기부했다. 2017년에 재일조선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김복동 장학금을 전달했고, 그의 마지막 유지 중 하나 또한 재일조선학교 지원을 계속해 달라는 것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암 투병의 와중에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인권과 평화를 전하던 김복동. 마지막까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규탄하며 화해치유재단 해산과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촉구하며 2018년 9월에는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위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암 투병 끝에 2019년 1월 28일, 93세로 생을 마감하며 영면에 들어갔다. 

김복동의 목소리와 행보는 전 세계 시민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다가갈 수 있도록 기꺼이 기억의 통로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를 찾고자 힘들게 내디딘 그의 발걸음은 큰 울림이 되어 우리 사회의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확장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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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김선미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교육홍보팀장. 여성학 전공. 논문으로 <개발교육 논의에 있어서 젠더 관점의 필요성:일본의 관광 개발사례를 중심으로>, <‘여성국제전범법정’에 있어서 마츠이 야요리가 지니는 의미>, <마츠이 야요리의 초국적 여성운동 연구>, 공저로 《경북 여성의 삶 예술로 꽃피다》, 번역서로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있게 싸워라》, 《혐오 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 공역서로 《빼앗긴 사람들 –아시아 여성과 개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