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활동가 선배 김복동
김복동을 기억하는 페미니스트 A
대학생 때 처음 참가한 수요시위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만났다. 그날은 설 연휴였는데 연휴라서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었고, 빌딩 숲 사이로 칼바람이 부는 평화로는 유독 추웠다. 으레 집회라고 하면 소리를 지르고, 무언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무서운 분위기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던 나에게 수요시위는 그 편견을 깨뜨려주었다. 할머니의 단호함, 그리고 우리의 요구사항이 분명한 건 맞지만 험악하지도 않고 무서운 분위기도 아니었다. 여성폭력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처음 인지한 나에게 오히려 수요시위는 '힐링'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학생들이 힘써 달라는 말씀 한마디에, 그때부터 나는 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까이서 만난 김복동 할머니는 훨씬 더 단단하고 올곧으며 또 따뜻한 분이셨다. "그 험한 데에서도 살아서 돌아왔는데 그깟 암은 이겨낼 수 있다"라고 하시며 수술하고 닷새 만에 1인시위를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아침부터 비가 엄청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외교부 앞으로 출발했는데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도로는 주차장이고, 시작 시각은 가까워져 오고 나는 혼자 초조해져서 안절부절. 겨우 도착하여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당신의 몸만 한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이어나가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물에 젖고 힘들어 불평하던 나의 마음을 반성하기에 아주 충분했다. 당신이 더 아프고 힘드실 텐데도 활동가에게 고생했다는 말씀 한 번 잊으신 적 없고, 가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도 챙겨서 쥐여 주시던 할머니.
할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고 나는 한동안 멍했다.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존경하고 사랑했기에, 김복동 할머니를 향한 마음의 크기가 많이 컸었나 보다. 추모 현수막을 제작하고 명단을 취합하고 장례식장을 지키고, 감히 상상하지도 않았던 일들을 일처럼 해내면서도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할머니가 다시 수요시위 현장에 나오셔서 일본대사관을 향해 크게 소리치실 것 같은데. 나도 이렇게 힘든데 할머니를 사랑하는 가족과도 같았던 다른 활동가들의 마음은 어떨까 걱정도 되었다.
사시사철 틀어놓으시던 모기향, 뜨끈뜨끈했던 방바닥, 늘 손에 꼭 쥐고 계시던 10원. 이런 사소한 것으로부터 문득 할머니가 떠오르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할머니는 떠나셨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잘 살아내고 있을까? 나 또한 잘 살아내고 있는 걸까? 할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잊지 않고 살아야지. 끝까지 기억해야지. 누구보다 단단하게 살아낸 활동가 선배, 김복동 선생님을.
우리를 걱정하던 커다란 영혼
김목인 (뮤지션)
작년 초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앨범 <이야기해주세요-세 번째 노래들>에 참여했다. 음악 작업을 준비하면서 그즈음 돌아가신 김복동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파란만장한 삶의 행로를 노래로 담는 것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노래 한 곡으로 요약하기에 그 삶의 무게가 커서였지 싶다.
다시 선생님을 떠올린 것은 동네에서 모르는 할머니 한 분을 뵈었던 어느 날이었다. 옆 동네에 왔다가 길을 잃으신 분이었는데, 딸이 모시러 올 때까지 내 옆에 꼿꼿이 서 계시던 모습에 김복동 선생님이 겹쳐졌다. 할머님은 내게 "바쁜데 이래도 되오?"라고 물으셨고, 나는 얼마 후 그 할머니에 대한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인물을 포갠다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김복동 선생님의 커다란 삶의 궤적은 요약도 은유도 어울리지 않는 듯했고, 나는 결국 가사 어디에도 '김복동'이 나오지 않는 어느 할머니에 대한 곡을 제출했다.
그 개운치 않던 마음은 다큐멘터리 <김복동>을 보며 조금 해소되었던 것 같다. 김복동 선생님의 생전 모습들을 보며 나는 그날 모르는 할머니께 왜 선생님이 겹쳐졌는지 알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일본 정부를 꾸짖는 용감한 영혼은 한편으로 항상 우리를 걱정하는 할머니였다.
선생님은 항상 젊은이들을 걱정하고 계셨다. 집회에서 고생하는 젊은이들, 경찰에 연행되는 젊은이들, 재일조선인학교의 학생들, 그리고 역사의 영향을 받을 미래의 젊은이들. 아마도 선생님의 모습이 굉장한 힘을 지녔던 것은 가장 고통받은 이로써 우리를 걱정하는 커다란 영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지금도, 다음 생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80세에 석등 하나를 남기고 부산을 떠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라 뭉클하다. 선생님이 이후에 보여주신 삶은 타의에 의해 피해자가 된 한 인간이 자의로 존엄을 되찾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사죄는커녕 변명으로 일관하는 상대를 멀찍이 넘어서는 위대한 본보기였다.
끝까지 싸워달라는 할머니의 유언처럼
박미순 (사회복지사, 웹진 결 독자 참여)
내가 기억하는 김복동 할머니는 국제 사회에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증언하신 분이다. 당시 상처로 가득한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은 세대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공개된 자리에서 힘든 이야기를 반복하셨을 할머니의 시간을 생각하니, 내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드셨을 거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할머니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다시 떠올려야만 했지만, 그로 인해 국제적으로 많은 사람이 일본이 감추고 있던, 감추고 싶은 과거를 알게 되었다.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 등등 할머니를 기억하는 수식어는 너무나 많다. 정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신 분, 하지만 끝나지 않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싸워달라" 는 할머니의 유언처럼 말이다. 세계의 많은 이들이 기억할 그 이름, 김복동 할머니의 웃는 얼굴과 그분의 인권 활동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기억될 것이다. 사랑합니다.
우리가 할머니의 나이가 되어도
김세진 (『평화의 소녀상을 그리다』작가)
나는 김복동 할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수요시위에서 먼발치에서 바라보거나 미디어를 통해 접한 것이 전부다. 그런 나에게 김복동 할머니는 항상 곱게 빗어 넘긴 백발, 고령에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시고 시원시원한 말씀을 내뱉는 분으로 가슴 속에 남아 있다. 9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기백으로 단상에 서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발언을 하시는 모습이 마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처럼 느껴졌다.
"사죄하라",
"천억을 준다 한들 진정한 사과가 없는데 받겠느냐"(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김복동 할머니가 한 말)
"미친 개 같은 소리 하지 마라"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위한 1인 시위 때 김복동 할머니의 한 말)
텍스트로만 접한다면 분노가 가득 찬 외침이라 느낄 수 있으나, 실제 할머니의 음성에는 분노보다는 마치 동네 악동을 야단치는 할머니 같은 인자함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에 적개심을 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당시의 끔찍한 전쟁범죄 피해 당사자의 분노는 어떻겠는가. 감히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복동 할머니는 분노가 아닌 평화와 희망을 바라보며, 자애와 자비의 자세로서 가해국인 일본을 향해 손을 내밀며 그 자리에 계셨다. "나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희망을 잡고 산다." 이런 말씀을 해오시던 할머니를 보며 우리는 소녀상을 세워 평화를 외치고, 그들을 용서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그들에게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그 전쟁에서 벌인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들이 우리와 함께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지.
김복동 할머니, 그리고 많은 피해자 할머니들이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과 보여주신 자세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으며, 우리가 할머니의 나이가 되고 미래세대가 시대의 주역이 되어도 함께 숨 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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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Editorial Team of Web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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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Team of Webzine <Kye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