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법과 사법(司法)의 동향

Posts 이철우

  • Created at2022.09.02
  • Updated at2022.11.28
*이 글은 2022년 8월 29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전문가포럼 라운드테이블의 기조발제문입니다. 

 

2022년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전문가포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이 글에서는 일본군‘위안부’ 손해배상청구소송(이하 ‘위안부’ 소송으로 약칭함)의 현황 및 제기되는 법적 쟁점(특히 국내 법원이 담당한 ‘위안부’ 소송)을 개관하고 몇 개의 토론거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토론거리는 ① ‘위안부’ 소송의 효과는 무엇인가, ② ‘위안부’ 소송의 배경과 원인, 사회적 함의는 무엇인가로 집약할 수 있다. 토론거리는 글 속에 흡수하여 서술한다.

사회운동 전략으로서의 법동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지원 단체가 소송을 중요한 전술적 수단으로 삼은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세계적인 공감을 얻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였다. 그 시기는 법적 규칙들을 자원으로 삼고 소송을 통해 법적 자원을 동원하는 이른바 법동원(legal mobilization)이 사회운동의 유력한 수단으로 대두한 시기이기도 했다. 탈냉전시대에 거대담론과 이념에 기초한 정당정치가 쇠퇴하고 법치의 중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법을 무기로, 법정을 싸움터로 삼아 정치적·사회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들이 활성화되었다. 이는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위안부’ 소송은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소송을 통한 법동원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경성법(hard law)을 원용하는 전술이지만 ‘위안부’ 소송은 국내외 시민사회의 강력한 문제제기에 의해 추동되었고, 점차 국제기구와 글로벌 시민사회의 발화를 통한 연성법(soft law)의 생산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소송은 해외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일본국을 상대로 한 소송이어서 국가면제(state immunity)의 법리 때문에 국내 법원을 활용할 수 없음을 감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법정에서 전개된 소송의 실패와 국제적 관심

‘위안부’ 소송이 시작된 것은 일본에서였다. 1945년부터 2019년 7월까지 일본 법원에 제기된 과거청산소송은 98건으로서, 그 중 한국인이 제기한 소송은 53건으로 절반을 넘고 있다.[1] 그 가운데 20건이 1990년대 전반기 5년에 집중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위안부’ 동원에 대한 사실인정, 사죄, 추모, 배상, 교육을 내용으로 하는 일본 정부의 책무를 제시, 요구하고 1990년 정대협을 발족한 이후 활발하게 규탄 활동을 전개한 때였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증언으로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일본을 방문해 증언을 계속했다. 김학순 증언에 따른 일본 국회의 질의에 대해 1991년 8월 말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 야나이 슌지는 청구권협정이 외교적 보호권만을 포기한 것이며 개인 청구권 그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고 발언했다.[2] 같은 해 12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의 첫 제소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한국인에 의해 일본 법정에서 전개된 ‘위안부’ 소송은 1991년 12월부터 1993년 4월까지 제소된 3건에 불과하다.[3] 그러나 소송 건수는 ‘위안부’ 피해자의 숫자를 고려할 때 당연한 것이었다. 한국인 피해자의 제소 후 1990년대에 걸쳐 필리핀, 중국, 대만인 ‘위안부’ 소송이 잇따랐다. 같은 시기에 전세계적으로 ‘위안부’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상해 일본을 압박했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유엔에서는 1996년 인권위원회(Commission on Human Rights) 특별보고관 쿠마라스와미(Radihka Coomaraswamy)의 보고서와 1998년 맥두걸(Gay J. McDougal)의 보고서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일본에 대해 국제법 위반 사실과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 개인들에게 배상하며,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피해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며, 역사적 사실을 교육하고, 범행에 가담한 자를 처벌할 것으로 요구했다.[4] 맥두걸 보고서는 일본이 피해자 개인에 대해 배상해야 하고, 일본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일본의 법정이나 관할권을 가지는 국가의 법정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하고, 범행에 가담한 자를 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조사하고 기소해야 하며, 일본은 배상과 범죄자 처벌의 진전에 대한 보고서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격년 보고해야 한다고 선언했다.[5] 두 보고서는 공히 1965년 청구권협정이 위안부 피해자의 중대한 인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으로부터 일본을 면책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위안부’ 소송은 성공하지 못했다. 한 사건에서만 1심 법원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가능하게 하는 입법을 하지 않은 위법한 부작위가 있었음을 인정했고, 그것도 항소심에서 번복되었다. 모든 소송에서 법원은 전전(戰前) 일본 국가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국가무책임의 법리, 어차피 20년의 제척기간이 지났다는 점, 또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문제라는 점을 들어 원고패소의 판결을 내렸다.[6] 이 모든 법리가 위의 두 보고서에서 제시한 판단 기준에 반하는 것이었다.

미국 법원에의 제소와 관할권 공방: 주권면제와 사법자제 

맥두걸 보고서에서는 일본에서의 사법적 구제가 시원치 않을 경우 관할권을 인정하는 다른 나라의 법원에 제소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국제법이나 미국의 조약법을 위반하는 불법행위에 대해 미합중국 법원에 관할권을 부여하는 외국인불법행위손해배상청구법(Alien Tort Claims Act)을 예로 들었다.[7] 바로 그런 견지에서 시도된 소송이 2000년 미합중국 DC관할 연방지방법원(US District Court for the District of Columbia)에 제소된 황금주 사건이었다. 이 소송은 황금주를 비롯한 6인의 한국인과 중국인, 필리핀인, 대만인을 포함하는 15인을 원고로 하지만 동종 사건의 피해자에게 승소 판결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는 집단소송(class action)이었다. 원고들은 배상과 사과, 문서 공개를 청구하는 한편 일본 정부의 행위가 외국인불법행위손해배상청구법과 강요된 성매매 및 강간 금지 규범에 반한다는 확인판결을 구했다.[8]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쟁점은 미합중국 법원이 이 사건에 대해 관할권을 가지느냐였고 그 골자는 국가면제(미국법에서는 주권면제sovereign immunity)의 법리에 따라 주권국가인 일본을 상대로 한 소송에 대해 미합중국 법원이 관할권을 가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주권면제가 배제되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였다. 원고들은 이 사건이 외국주권면제법(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이 규정하는 주권면제 예외 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주권면제의 배제 근거로 ① 포츠담선언을 통해 주권면제를 포기했고, ② 국제적 강행규범(jus cogens)을 위반함으로써 주권면제를 묵시적으로 포기했으며, ③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의 동원은 미합중국에 직접적 효과를 가지는 상업적 행위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연방지방법원은 포츠담선언이 주권면제의 포기를 담고 있지 않고, 주권면제의 묵시적 포기는 포기의 의사가 드러나는 경우에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 국제적 강행규범의 위반으로부터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의 동원은 원고들의 주장으로부터 보아도 국가의 관여가 분명하여 상업적 행위라 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예비적 판단으로서 설사 주권면제를 배제한다고 해도 이 사안은 행정부가 판단할 정치문제(political question)로서 법원의 관할권이 배제된다고 보아 소를 각하했다.

원고들의 항소를 수리한 DC관할 연방항소법원(US Court of Appeals for the DC Circuit)은 제1심 판결을 승인하면서도 다소 다른 근거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모든 종류의 사건에서 주권면제를 인정했다가 1952년에야 상업적 행위 등을 배제하는 제한적(restrictive) 주권면제로 이행하였는바, 그 이전 사건에 외국주권면제법을 적용하는 것은 모든 행위에 대해 주권면제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일본의 확립된 기대에 반하는 소급효를 가지게 되어 불공정하다는 것이었다. 1952년 이전에는 행위의 성격을 따지지 않았으므로 상업적 행위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제1심 법원의 판단과 차이가 있다. 아울러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연합국은 일본에 대해 청구권을 포기했는데 제3국 국민이 미합중국 법원에서 일본을 상대로 제소한 사건을 미합중국 법원이 수리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이유를 추가했다.

그런데 원고들의 상고허가(미국법상으로는 연방대법원에의 이송명령certiorari) 신청을 수리한 연방대법원은 항소법원 판결 중 외국주권면제법의 소급적용을 부정한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항소법원으로 환송했다. 이에 따라 항소법원은 주권면제 쟁점을 제쳐두고, 이 사건이 법원의 판결로 다루기 힘든 정치문제(political question)임을 이유로 소를 각하했다. 샌프란시스코조약에 후속하는 한국, 중국, 대만과의 조약에 대한 해석을 수반하는 것이고, 한·일간의 청구권협정에 대한 한·일간의 해석이 다른 상황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는 법원이 다룰 수 없는 고도의 정치적 쟁점이라는 것이다.[9]

국제규범에의 호소와 세계시민법정  

황금주 소송이 시작된 같은 해에 전시성노예를 규탄하는 여러 나라의 시민단체가 준비한 「일본군 전시 성노예 국제여성법정」(Women’s International Tribunal on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이 열렸다.[10] 1998년 제정된 국제형사재판소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이 무력분쟁 하의 성폭력에 대해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보여준 국제규범의 동향에 힘입은 것이었고, 이 법정의 판결 녹취문 중 “법은 정부에 배타적으로 귀속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도구’”라는 대목에서 보듯이 법다원성(legal pluralism)을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1994년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피해자와 시민단체 대표들의 일본 검찰에의 고소·고발도 당연히 무위로 돌아간 후 그러한 공식 법제와 대조되는 비공식적 시민사회의 법을 내세운 것이다.

한국 사법부를 통한 논의의 확대: 한일회담 문서 공개와 청구권협정상 분쟁해결 부작위 위헌 확인

일본과 미국에서 소송이 실패로 귀결된 후 결국 ‘위안부’ 운동을 위한 법동원의 장은 국내 사법부가 되었다. 이는 국제적·국내적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국가가 매개하여 권리 주장의 바탕을 이루는 조약 해석을 제시한 것에 힘입었다. 즉 2005년 노무현 정부는 한일회담 문서공개에 따른 후속대책을 논의하는 민관공동위원회를 가동했고, 동 위원회는 청구권협정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함이 아니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여전히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민관공동위원회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해석이 갈리지만, 민관공동위원회는 일본군위안부,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가 청구권협정에 의해 커버되지 않았음은 분명히 했다.[11] 민관공동위원회라는 장을 열게 만든 수단 역시 소송이었다. 즉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1952-1965년 기간의 한일회담 회의록을 공개하라는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외교통상부가 거부처분을 한 것에 대한 행정소송이 이끌어낸 결과였다.[12]

이듬해 64명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정부가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 절차에 나서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두 해 뒤 원폭피해자 역시 같은 취지의 청구를 했다. 2011년 헌재는 두 사건에 대해 국가의 부작위가 위헌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13] 1998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국가가 청구권협정에 관한 일본과의 의견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중재회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헌심판을 청구한 것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린 것과 비교해보면, 다소의 법리상 차이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입장을 바꾼 것에 다름 아니었다.[14]

2015년 한일외교장관 합의와 2021년 두 개의 충돌하는 판결

이러한 압박 속에 나온 것이 박근혜 정부의 2015년 12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외교장관 합의이다. 치유를 위한 재단의 설립과 일본 정부 예산으로부터 10억엔 정도의 출연,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으로 인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 확인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 합의는 정치적 논란과 법적 성격에 대한 이견 속에 현재 그 운명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 합의가 조약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 비구속적 합의로서 법적 권리·의무를 창설하지 않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가 처분되지 않았다고 판정했다.[15]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압박받아 서두른 한일‘위안부’합의가 오히려 일본군‘위안부’ 문제로 인한 정치·외교적 난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정치적·외교적 노력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사법 - 헌법소원심판과 헌재 결정 - 에 의존하여 문제해결을 재촉한 결과 발생한 정치적 혼란이 다시 역으로 사법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동인을 생산해냈다. 이미 2012년 대법원이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고 그 판결에 대한 반론보다는 지지하는 여론이 더 강한 상태에 고무된 바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 지원단체는 그간 국가면제라는 제약을 의식하여 시도하지 않았던 국내 소송에 나서게 되었다. 2016년 일본국을 상대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두 개의 소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된 것이다.
    
이 사건들에 대한 판결은 2021년 1월과 4월에 각각 선고되었다. 2018년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재상고심 판결이 내려지고 2019년 판결의 집행이 준비되자 일본과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국내 여론도 극심한 분열 상태에 빠져들면서 문재인 정부의 국정난맥과 함께 소송을 통한 법동원을 지지해온 민족주의적 대중정서가 약화되기 시작한 이후였다.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인이 청구한 사건에 대한 판결에서 재판부는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 동원을 주권적 행위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반인도적 범죄행위라는 점에서 국가면제에 대한 예외에 해당한다고 보아 국내 법원의 관할권을 인정하면서 원고들에게 각 1억원을 지급하라는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서는 2차대전 말기 독일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노동에 혹사된 이탈리아인들이 독일을 상대로 이탈리아 법원에 제소한 소위 페리니(Ferrini) 사건에서 이탈리아 대법원이 주권적 행위라 해도 국제적 강행규범을 위반한 행위라는 이유로 국가면제 배제를 결정했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해 이탈리아의 국제법 위반을 인정한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 및 그것을 반영하는 국내 입법이 위헌임을 선언했다는 점에 주목했다.[16]

반면 곽예남·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20인을 원고로 하는 사건에 대해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가 3개월 후에 내린 판결에서는 페리니 사건으로 촉발된 독일과 이탈리아의 분쟁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의 취지에 공감하면서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 행위를 국가면제로부터 배제하는 국제관습법이 형성되었다는 원고의 주장을 배척했다. 아울러 국가면제가 인정되더라도 피해자들이 소송 외에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 행사로 볼 수 있는 2015.12.28. 한·일 합의에 의하여 이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대체적인 권리구제수단’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로 침해가 과도하다는 주장도 배척했다. 이 재판부가 한일‘위안부’합의의 실효성과 이를 통한 권리구제의 가능성을 상당히 인정하고 있음이 주목된다.[17]

 위의 두 판결은 일본국이 항소하지 않음으로써 확정되었다. 이처럼 동일한 배경과 성격의 사건에 두 개의 충돌하는 판결이 내려진 가운데 승소한 원고들의 집행을 개시하는 재산명시를 명하는 결정이 내려진 상태이다.[18]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의 집행을 앞두고 긴장이 고조된 상태에서 정부에 의한 채무인수 등 여러 대안이 논의되고 있으나 정부와 피해자들 사이에 협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고 일본의 태도 변화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충돌하는 ‘위안부’ 판결의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조율할지, 열린 마음의 토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법동원의 양가적 결과: 사회적 인정, 정치의 사법화, 의제의 축소 

지금까지 ‘위안부’ 소송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일본에서의 소송은 모두 패소했다는 점에서는 실패라 할 수 있지만 “반세기 가까이 가슴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피해를, 일본의 재판소가 판결문이라고 하는 공적인 문서에서 그 피해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피해의 사실을 인정한 것도, 피해에 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 자체가 피해의 구제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19] 미국 법원에서의 소송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소송전이 본격화되자 1990년대 초반 다소나마 우호적인 면모를 보인 일본의 여론이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소송이라는 수단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다기보다는 소송을 비롯한 여러 문제제기의 수단들이 동원되어 일본을 압박한 것이 방어심리를 자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아가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은 한일관계를 경색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원고승소의 ‘위안부’ 판결은 직접 일본국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부정하고 배상을 명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었다.
    
정치적으로 비중이 있거나 민감한 사안을 정치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사법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경향이 탈냉전시대 세계 곳곳에서 목도된다.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과 ‘위안부’ 소송은 정치의 사법화의 좋은 예들을 제공했다. 정치의 사법화를 가져오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뜨거운 감자를 회피하려는 정치권의 소극적 자세도 그 중 하나이다. 정부는 피해자 및 시민사회와의 대화를 소홀히 하다가 소송과 판결에 따른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것이 미흡하다고 생각한 피해자와 지원단체들이 다시 소송전을 전개하고, 법원은 후속 조치를 정치권이 해결해줄 것으로 보고 권리 존중의 이상적인 판결을 한다. 즉 뜨거운 감자를 다시 정치권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법학자로서 한일간 과거청산을 위한 법적 투쟁을 지원해온 김창록은 ‘위안부’ 문제가 서 있는 지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법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곧 현재의 세계질서와 그 속에서의 동북아질서 및 한일관계의 법적 틀을 근원적으로 재점검하는 작업, 즉 ‘전후 국제질서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기도 하다.”[20] 소송이 이처럼 큰 질서의 균열을 보여주는 엄청난 사건임은 그만큼 소송이 정치와 외교에 큰 숙제를 안겨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소송이 가진 그러한 정치적 무게는 개인의 피해 구제와 국가의 역사적·정치적 명분의 보호 사이에 긴장을 초래한다. 그러한 긴장은 일본군‘위안부’ 소송에서 아이러니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국에서 벌어진 황금주 소송과 국내 두 건의 소송 모두에서 위안소의 설치·운영 및 위안부 동원이 상업적 행위라는 주장이 원고측에서 나왔다. 위안소가 “국가가 감독하는 유곽(brothel)”이며 병사들은 고정된 가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았다는 점을 강조할 정도였다. 사건이 대법원으로부터 항소법원에 환송되자 원고들은 상업적 행위임을 재삼 주장하면서 그 행위가 미국에 직접적 효과를 가진다는 점을 판단하기 위해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환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위안부 소송을 지원하는 세계의 단체 - 한국 단체도 포함 - 를 대표해 아미커스(amicus curiae) 의견서를 제출한 전문가들도 일본의 행위가 상업적 행위임을 주장했다. 국가의 행위이긴 하지만 그것은 카라유키상을 모집하고 동원한 매춘업자들의 행동을 모방했기 때문에 성격에 있어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안소의 설치·운영과 위안부 동원을 매춘업자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본의 주장 자체가 그 행위가 상업적 행위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논리도 피력했다.[21] 2000년 국제여성법정에서 판사로 역할했고 국내에서 2016년 제기된 12인 원고 소송을 지원한 영국의 국제법학자 친킨(Christine Chinkin) 등도 일본의 행위가 상업적 행위라는 주장을 폈고, 그러한 의견은 원고측 주장의 일부를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22] 두 판결 모두에서 그러한 주장을 배척했다.
    
위안부 동원을 상업적 행위로 취급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위험한 주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인신매매(trafficking)를 수반하는 매춘을 모두 동일하게 취급해 규탄하는 국제적 페미니즘의 논리와 외세에 유린된 과거사를 다루는 입장이 충돌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초기 소송에서 나타난 다양한 청구들 - 사실인정, 사죄, 배상, 교육 - 은 소송전이 여론을 환기하고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2016년 소송에서는 청구가 금전적 배상으로 축소되어 있다. 이는 여론 동원 수단으로서 소송이 가지는 역할이 줄어드는 한편 민사소송제도가 허용하는 청구의 형태에 규정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배상 판결은 금전적 배상을 둘러싼 논란을 일으킴으로써 피해자 주장에 대한 여론의 공감을 약화시킨다.

 

각주

  1. ^ 「한-일 ‘강대강’ 대결의 진원... 대법원 판결 핵심 정리」, 『오마이뉴스』, 2019.7.30.
  2. ^ 김창록, 「일본에서의 대일과거청산소송 - 한국인들에 의한 소송을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제35호 (2007), 343-345면.
  3. ^ 같은 글의 부록에서 김창록은 2007년 2월까지의 한국인 제소 40건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4. ^ 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 E/CN.4/1996/53/Add.1, 4 January 1996.
  5. ^ An Analysis of the Legal Liability of the Government of Japan for ‘Comfort Women Stations’ Established During the Second World War, E/CN.4/Sub.2/1998/13, 22 June 1998.
  6. ^ 김창록,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법적 검토 재고」, 『법제연구』 제39호 (2010), 79-108면; 오승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손해배상소송에 관한 연구 - 해외 법원의 판결을 중심으로」, 『법학논총』 제42권 제1호 (2018), 130-141면; 髙良沙哉, 「‘慰安婦’訴訟の意義と課題」, 『地域研究』 제13호 (2014), 133-152면.
  7. ^ 위의 맥두걸 보고서, para. 52.
  8. ^ 이 소송이 일본에서의 더딘 소송 진행과 비관적 전망에 따른 것인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이 소송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1990년대에 일본에서 제기된 3건의 위안부 소송 중 시간적으로 뒤에 제기된 1992년과 93년 소송의 제1심 판결이 각각 1998년과 99년에 선고되었을 뿐이었다.
  9. ^ Hwang Geum Joo et al. v. Japan, 172 F. Supp. 2d 52 (D.D.C. 2001); 332 F.3d 679 (D.C. Cir. 2003); 542 US. 901 (2004); 413 F.3d 45 (D.C. Cir. 2005). 환송심 판결은 한·일간 청구권협정의 해석 차이를 언급하면서 김창록의 의견서를 인용했다. 황금주 사건에 대한 해설로는 김창록, 앞의 글(2010), 91-93면; 오승진, 앞의 글, 141-145면.
  10. ^ 그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김창록, 「2000년 여성국제법정의 맥락」, 『법과 사회』, 제66호 (2021), 205-244면. 
  11. ^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개최 보도자료」, 2005.8.26. 
  12. ^ 서울행정법원 2004.2.13. 선고 2002구합33943 판결.
  13. ^ 헌재 2011.8.30. 2006헌마788; 2011.8.30. 2008헌마648.
  14. ^ 헌재 2000.3.30. 98헌마206.
  15. ^ 헌재 2019.12.27. 2016헌마253.
  16.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1.8. 선고 2016가합505092 판결.
  17.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4.21. 선고 2016가합580239 판결.
  18.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6.9. 선고 2021카명391 결정.
  19. ^ 김창록, 앞의 글(2010), 100면. 중국인 ‘위안부’ 소송에서 최고재판소가 샌프란시스코조약의 틀 속에서 청구권이 포기되었다는 취지는 청구권이 실체적으로 소멸했다는 뜻이 아니고 재판상 소구할 권능만이 상실된 것이라는 해석도, 비록 청구를 배척하기 위한 또 하나의 논리이지만, 일본 사법부가 과거청산 문제에 대해 압력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20. ^ 같은 글, 103면.
  21. ^ Brief of Amici Curiae Askin et al. in Support of Plaintiff-Appellants Hwang Geum Joo et al. and Reversal of the District Court’s Decision, 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 for the District of Columbia Circuit, No. 01-7169, August 28, 2002.
  22. ^ Christine Chinkin and Keina Yoshida, Opinion in the Case of Kwak Ye-Nam et al. v. Japan in the Seoul Central District Court, 7 October 2020.
Writer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