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중국은 19세기 말 일본군‘위안부’ 제도가 최초로 실행된 발원지로서, 한국과 더불어 ‘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 중 하나이다. 그러나, 성적 순결을 잃은 여성을 가족의 수치이자 민족의 치욕으로 여겼던 가부정적인 중국 사회 속에서,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중국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시작으로 ‘위안부’ 문제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또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 가장 큰 쟁점은 바로 일본의 법적 책임과 그에 따른 개인 청구권 문제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처음 중국 국내에서 쟁점화되었을 때, 일본 정부를 향해 일관되게 피해 배상을 요구해온 민간단체와는 달리, 중국정부는 일본정부를 향해 배상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최대 피해국으로서, 전쟁배상에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중국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 글에서는 중국 ‘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중국 정부와 민간단체의 입장 및 대응 차이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법학 강사 통정(童增)의 논문으로 시작된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중국 사회의 수면 위로 드러나기 이전이었던 1990년대 초, 중국 국내에는 이미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베이징 화공 관리 간부 학원(北京化工管理干部学院)의 법학 강사였던 통정(童增)은 동유럽 국가들의 전쟁배상 소송 기사를 접한 후, 중일 간 전쟁 피해 배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연구를 통해 「중국은 일본에 피해배상 요구를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다(中国要求日本“受害赔偿”刻不容缓,1990)」라는 제목의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국가배상과 민간배상은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중국 정부에 의해 국가의 배상청구권은 포기되었으나,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정은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 신문사, 잡지사 등 각종 매체를 찾아갔지만 민감한 문제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1]
통정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91년 3월 베이징에서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이하 전인대) 제4차 회의가 열리자 통정은 각 성의 인민대표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 직접 찾아가 자신의 논문을 전달했다. 귀주(贵州) 전인대 대표단의 왕루셩(王录生)은 통정의 논문에 관심을 보였고, 이를 전인대 제5차 회의에서 의안으로 제기하고자 했다. 왕루셩은 인민대표들에 이 문제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통정에게 국제법의 관점에서 국가배상과 민간배상의 개념 차이 및 배상 문제를 자세히 설명한 글을 다시 작성하게 하였다. 이에 통정은 「국제법의 신개념—피해배상(国际法的新概念—受害赔偿)」이라는 글을 완성하고 그해 5월 『法制日报(법제일보)』에 발표하였다.[2] 이후 왕루셩을 비롯한 32명의 귀주 전인대 대표 그리고 왕공(王工) 및 38명의 안훼이(安徽) 전인대 대표가 각각 대일배상 요구에 관한 의안을 제기하였고, 이는 전인대 제5차 회의의 제7호의안과 제10호의안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두 의안은 사회 각 계층의 관심을 받았고, 현지 매체들은 통정의 글을 빠르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위안부’ 문제 민간연구가 장솽빙(张双兵)은 통정의 글을 읽고, 허우둥어(侯冬娥) 할머니를 찾아가 피해 사실을 고백하도록 설득하였다. 거듭되는 설득에 할머니는 5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피해 경험을 털어놓았다. 1992년 7월 7일, 장솽빙의 도움으로 허우둥어 할머니를 포함한 중국 산시성(山西省)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5명과 친족 3명은 주중일본대사관에 사죄 및 배상을 요구하는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는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가 처음으로 일본 정부에 제기한 피해배상 요구로서,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오랜 기간 숨겨왔던 자신의 피해 경험을 고백하고,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 및 배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통정은 피해자들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맡아줄 변호사를 물색했다. 1994년 5월 6일, 중국의 대일소송 문제에 관심이 있던 한 일본 기자가 일본 민주 법률가협회 사무국장 오노데라 토시타카(小野寺利孝)에게 중국의 상황에 대해서 알렸다. 이후 기자의 도움으로 오노데라는 통정과 만남을 가졌고, 중국 피해자들의 상황을 인지하게 되었다. 오노데라는 그해 8월 통정과 협약을 맺고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대일 손해배상청구소송의 법률대리인이 되었다.
오노데라는 32년 동안 이에나가사부로의 역사교과서 재판을 담당했던 오야마 히로시(尾山宏) 변호사를 변호단 단장으로 임명하고, 그의 추천에 따라 731부대 및 난징대학살 소송 담당자 와타나베 하루미(渡边春己) 그리고 한국, 필리핀 일본군‘위안부’ 소송을 담당했던 오모리 노리코(大森典子)를 주축으로 발기인그룹을 조직했다. 이는 일본민주법률가협회 및 일본변호사연합회 변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많은 변호사들이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 조사 및 소송 활동에 참여 의향을 밝혀왔다. 이에 따라 중국인 전쟁손해 법률조사단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총 4차례 중국을 방문해 현지를 조사하고 피해자와 만났다. 이후, 1995년 8월 중국인 전쟁 피해 배상청구사건 변호사단이 조직되면서, 대일소송을 위한 ‘위안부’ 피해자 개별 사례 조사가 정식적으로 실시되었다.
이외에도, 일본 오카야마 대학의 이시다 요네코 교수를 비롯한 일본의 학자, 변호사, 학생 및 일반인들이 중국에서 발생한 일본군대의 성폭력 진상 조사 및 배상청구 소송 지원회(이하 차명회)를 1996년 10월에 결성했다. 이들은 중국 산시성 거주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고, 동시에 대일소송을 지원했다. 이처럼 일본 민간단체의 도움과 함께, 본격적인 중국의 ‘위안부’ 피해자 대일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중국 ‘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 사례
1995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제기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총 4건이며, 4건 모두 패소하였다. 각 소송 사례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일본 재판부는 아래 논리를 원용하여 ‘위안부’ 피해자의 청구를 기각했다.
1) 군속,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요청을 기각하는 판결을 내놓았다." popuptitle="일본 민법 제724조" data-url="/taxonomy/term/440">일본 민법 제724조에 따라 청구권의 공소시효는 만료되었다.
2) ‘위안부’ 제도는 일본 헌법 제정 이전에 발생한 행위로 국가에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 (국가무답책)
3) 국제법상 개인이 주체가 되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할 수 없다.
4) 1952년 대만과 일본 사이에 맺은 일화평화조약으로 중국인의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었다.
5) 1972년 중일공동성명의 제5조(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중일 양국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의 청구를 포기하는 것을 선언한다.)에 의해 중국인의 개인청구권은 이미 소멸되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각주
- ^ 童增:中国存在强大的反日、仇日、厌日情绪(2013/09/14), http://news.ifeng.com/mainland/special/ribenguan/detail_2013_09/14/29613716_0.shtml
- ^ 王录生:《民间对日索赔》议案提出内幕. 时代潮,2005(17):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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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조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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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단대학교 석사 졸업(2019년 석사학위 취득). 석사 과정 당시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연구를 시작하여 학위 논문으로 한중일 3국의 ‘위안부’ 문제를 비교연구한 <한중일 ‘위안부’ 문제 연구: 한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대일손해배상청구소송 사례를 중심으로>를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