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문제 방법으로 사유하기 <1부> -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문제

이선이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 게시일2019.03.14
  • 최종수정일2019.11.20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문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면 일본군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잔혹한 폭행을 당한 무구한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피해가 빈번히 일어난 곳 중 하나는 당시 전쟁터였던 중국이다. 일본군은 전쟁 중 중국 여성에 대해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 전쟁터와 점령지, 도시와 농촌에서 공공연하게 여성을 끌고 가 성적 유린을 자행했다.  

지금까지 발표된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에는 허우둥어(侯冬娥, 1921년생)라는 분이 있다. 허우둥어는 가이산시(蓋山西)로 유명한데, 가이산시는 산시성 최고의 미인이라는 의미다. 그녀에 대해서는 단행본과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와 있는데, 잔혹하게 피해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여주는 모습이 잘 담겨 있다.  그녀는 중국에서 최초로 일본 정부를 제소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허우둥어를 비롯한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몇 명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허우둥어(侯冬娥), 류멘환(劉面換)
완아이화(万愛花)

&nbsp;재일중국인 班忠義의 『ガイサンシー(蓋山西)とその姉妹たち』(가이산시와 그녀의 자매들)의 중국어 본 표지&nbsp;
 

1938년부터 39년 사이에 산시성 위현(盂縣) 주변이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허우둥어(侯冬娥, 1921년생)가 살던 지역까지 점령되었던 것은 1941년 가을 경이었다. 1942년 여름 무렵, 일본군이 촌장의 딸을 끌고 가려고 하자 촌장은 일본군에게 딸 대신 당시 미인으로 이름 높았던 가이산시(하우둥어)를 데려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끌려간 하우둥어는 일본군의 모진 폭력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지게 되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함께 끌려갔던 어린 여성을 대신하여 일본군의 폭력을 견뎌주었다는 다른 피해자의 증언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당찬 여성이었다. 일본군에 끌려가기 전 그녀는 마을 최초로 공산당원이 된 여성이었으며, 부인 구국회 회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중국에서 벌어진 잦은 정치 운동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끌려간 사실이 문제가 되어 당원자격을 박탈당했다. 하우동어는 그 충격으로 자살 미수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94년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그녀의 삶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죽기 얼마 전에는 과거 피해를 함께 입었던 분을 찾아가 “우리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몇 번씩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류멘환(劉面換, 1927년생)은15세 때 한간이 된 마을 사람이 무장한 일본군 3명을 데리고 집으로 들이닥쳐 어딘가로 끌려갔다. 모진 성폭력을 당한 후 부모님이 마련한 재물을 괴뢰정부(유지회)에 바치고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풀려난 후에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괴로워했으며, 결혼 후 자녀들에게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일본군은 내 일생의 재난을 만들었다”라고 말하였다.    

 



허우둥어가 살았던 집의 모습 (출처 :&nbsp;http://www.sohu.com)

 

또 다른 피해자인 완아이화(万愛花, 1930년생)는 14살이었던 1942년에 공산당원이 되어 항일사업, 선전과 군화 만들기 등 공산당 아동 당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활동 기간이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던 1942년부터 44년까지 약 4년에 걸쳐 한간과 일본군에 의해 몇 차례에 걸쳐 특정 장소에 끌려가 심한 고문과 성폭력의 수난을 겪게 된다. 그녀의 입에서 공산당원의 이름을 말하게 하는 것이 고문의 목적이었다고 한다. 완아이화는 일본군으로부터 풀려난 후 양녀를 얻어 이곳저곳을 떠돌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녀는 하우둥어와 함께 처음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하였으며, 2000년 11월에 도쿄지방재판소 소송에서 본인 심문을 받았다.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2000년,&nbsp;완아이화(맨 앞줄)가 일본정부를 제소하러 가는 모습 (출처 :&nbsp;twoeggz.com)

 

 

난얼푸(南二僕), 위안주린(袁竹林)
린야진(林亞金)

난얼푸(南二僕, 1912년생)는 1942년 봄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군들에 의해 일본군 거점으로 끌려가 일본군 소대장에게 1년 8개월 정도 지속해서 폭력을 당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일본군과 오래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기도 하였다. 풀려난 후에도 낙인은 사라지지 않아 사회적 압력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하였다. 살아있을 적 그녀는 항상 ‘일본 놈’들의 악행에 관해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위안주린(袁竹林, 1922년생)은 후베이성 우한(武漢)사람인데, 세탁일로 간신히 연명하며 살고 있었지만, 아이도 제대로 먹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여성이었다. 1940년 봄, 장슈잉(張秀英)이라는 여자가 여관의 청소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집에 응하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관우 사당을 ‘위안소'로 개조하여 만든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마사코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신체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배분받은 7평 정도의 그녀의 방 앞엔 일본식 이름이 적힌 명패가 걸렸다. 위안주린은 일본군의 성적 유린을 견뎌야만 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위안주린은 어머니와 함께 우한 근처의 산간마을에서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마을에서 열린 정치집회에서 딸이 일본인에게 강간을 당한 비참한 경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의 생활에 큰 화를 불러왔다. 사회적,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오지로 쫓겨가 오랜 시간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녀는 “나의 고통은 일본인이 돈으로 배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결백과 사과를 요구한다”고 말하였다.

린야진(林亞金, 1924년생)은 하이난성 바오팅현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군이 바오팅현 인접 지역인 산야를 점령하였다. 1940년 산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파견대가 바오팅현에 침입해 병영을 세웠다. 1943년 10월경 린야진은 여성 4명과 함께 벼를 베고 있다가 무장한 일본군들에 의해 거점으로 끌려갔다. 그녀들은 ‘이상한 건물’에 갇혔는데, 대문으로 들어가 각각 작은 방에 갇혔다고 한다. 매번 유린을 당한 후 규정에 따라 반드시 하반신을 씻어야 했다. 일본인은 그녀들에게 약을 먹도록 강요했다. 약은 흰색과 빨간색으로 납작하고 새끼손가락 손톱만 한 크기였다. 평소 건물 대문은 항상 일본군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함께 붙잡힌 4명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가족들이 음식물을 보내고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모진 폭력으로 3명 모두 사망하였으나 린야진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린야진은 문화대혁명 시기 ‘일본 창녀’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린야진은 “나는 일본인을 증오한다. 꼭 일본인이 사죄하고 배상하도록 하겠다. 지금 나는 늙어 일도 못 하고 있다. 아직도 이 모욕을 당하고 있다.”라고 반복적으로 작은 소리로 말하곤 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피해를 입은
중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연구를 대표하는 수즈량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위안부'를 충당한 방식에 대해서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 전쟁터와 점령지 도시와 농촌에서 공개적이고 폭력적으로 여성을 끌고 간 경우. 두 번째, 여종업원과 세탁부를 구한다는 명목의 속임수. 세 번째, 점령지의 형세가 안정되면 유지회(괴뢰정부)를 통해 모집. 네 번째, 여성 포로로 잡힌 여성을 활용. 마지막으로 대도시에서 일본군과 괴뢰정권이 기존 창기를 활용하였다.

 앞에서 소개한 피해자들을 이 범주에 굳이 맞추어 본다면, 첫 번째 방식에 허우동어, 류멘환, 린야진, 난얼푸가 해당되고,  두 번째 업자(장슈잉)의 속임수로 인한 피해자가 위안주린, 그리고 네 번째, 여성 포로에 해당하는 경우가 완아이화이다. 창기에서 피해자가 되었다는 분은 일본인 피해자 중에는 계시지만, 아직 중국인 피해자 구술에서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창기였다가 피해자가 된 분이 피해를 밝히고 나오기는 어디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유지회, 한간 등이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자들의 피해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피해자들의 구술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피해자들의 피해 실태를 무례를 무릅쓰고 정리하다 보면 일본군이 침략을 자행해가는 과정에서 행한 여성들에 대한 폭력의 어떤 양상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일본군은 전쟁터에서 여성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을 군인들에게 ‘위안품’으로 제공하여 ‘위안소’(강간 캠프)에서 지속해서 폭력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가 일단락되고 유지회=괴뢰정부가 들어서면 ‘위안품=여성’의 공급을 그들에게 위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안주린의 경우처럼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가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본군이 업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산시는 치열한 전쟁터가 된 지역이었기에 전시 강간과 유사한 피해자가 많다. 위안주린은 우한이라는 도회지와 가까운 곳에서 취업 사기로 피해자가 되었다. 중국의 전시 강간 피해자 중에는 ‘위안소’에서 조선 여성을 목격했다고 증언하는 이도 있다. 조선 여성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끌려가 중국의 피해 여성들과 조우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이 문제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일본군은 군대의 이동에 ‘위안소’를 대동했는데, 전시 강간 억제가 이러한 조치 요인의 하나였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위 피해자들의 상황을 보면 전시 강간과 ‘위안소’의 경계를 가르기 쉽지 않다. 단지 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 군인들에게 여성을 ‘위안품’으로 제공한다(받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작동하는 권력의 차이에 따라서 폭력의 양상을 달리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계의 모호성은 ‘상업적’ 조건을 갖추면 면책될 수 있다는 일본 우익의 주장이 얼마나 철학적으로 빈곤한가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중국의 피해자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피해의 내용을 너무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먼 곳으로 끌려가 피해를 입은 조선의 피해자들과는 또 다른 2차 피해를 겪었다는 것을 피해자들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창기 해방사업을 통해 실제로 성매매시장을 없앴다. 성매매시장은 사라졌지만, 창기에 대한 ‘오욕’은 온존하였다. 더구나 피해자들에 대한 적의 유린이 창기로 뒤바뀌어 그 오욕이 더욱더 깊게 새겨졌다. 위에 소개한 피해자들은 모두 전후 중국에서 일어난 정치 운동 속에서 ‘일본 창녀’, ‘역사적 반혁명’, ‘마을의 창피’라는 비난과 질시를 견뎌야 했다.

중국의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들이 전후 처한 상황을 시야에 넣게 되면 이 문제를 사유하는 것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제국주의가 벌인 전쟁과 그 전쟁에서 혹독한 피해를 입은 여성들, 즉 가해와 피해로 전선을 나누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라는 요구가 도출된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피해자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전후 피해자들이 처한 위치를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 읽으면 사회적 약자의 싸움이 얼마나 지난한지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문제를 통한 사유의 사정거리는 어디까지일까? 그것을 중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글쓴이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논문으로 「중일전쟁시기 딩링(丁玲)의 일본군 성폭력재현과 1956년 전범재판 그리고 피해자 증언의 의미」, 「일본군의 성폭력에 대한 일고찰: 중국산서성피해자의 구술을 중심으로」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딩링: 중국 여성주의의 여정』,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역서)『일본군 중국 침략 도감 : 일본군 ‘위안부’와 성폭력』(역서) 등이 있다. 

sunyi3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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