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1부 - ‘남성영화’로서의 <귀향>

글 손희정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지금/여기 ‘위안부’ 영화의 안과 밖 1부
‘남성영화’로서의 <귀향>

이 글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요청에 따라 『페미니즘 리부트』(2017)에 수록되어 있는 「기억의 젠더 정치와 대중성의 재구성: 대중 ‘위안부’ 서사를 중심으로」을 요약하고 수정한 글입니다.

 

남성영화의 시대와 ‘위안부’ 영화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대체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남성 중심 서사에 몰두해 왔다. 2015년이 되면 이런 경향에 대한 비판이 점점 강해지는데, 아마도 ‘벡델 테스트’의 인기는 이렇게 여성 캐릭터를 소외시켜온 한국영화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였을 것이다. 미국의 만화가 앨리스 벡델이 고안한 이 양성평등지수 테스트는 “영화에 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둘 이상 등장하는가, 2. 그 두 여성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3. 그 대화의 내용이 남자에 관한 것이 아닌가”를 질문한다. 사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그 작품이 바로 ‘여성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한국영화의 현주소란 이 정도의 테스트조차 까다로워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는 대중들에게 유의미한 기준으로 회자되었다.

한편, 2017년의 경우 흥행 한국영화 15위 안에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아이 캔 스피크>(2017) 단 한 편이었다. 이 역시 살펴볼만하다. 지난 3년 간, 소위 여성영화로서 화제를 불러 모으거나 흥행을 한 작품 안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가 특히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2016년 개봉한 <귀향>은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놀라운 흥행성적을 올렸다. KBS 특집 드라마로 제작되어 영화로 재편집된 <눈길>(2017)은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손희정, 권명아, 권은선, 주유신 등) 비평가들 사이에서 <귀향>과 함께 비교해서 볼만한 작품으로 계속 회자되었다. <아이 캔 스피크>(2017)는 웰메이드 상업영화로서 흥행하면서 여성 아티스트 나문희에 대한 관심을 불러모았고, <허스토리>(2018)는 충성도 높은 팬덤인 ‘허스토리언’의 탄생을 불러왔다. 여전히 남성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여성의 이야기는 잘 상상되지 않는 한국 영화판에서, 여성서사 중에서는 유독 ‘위안부’ 서사가 큰 관심을 받는 것은 왜일까? 이전까지는 ‘위안부’ 문제가 한국영화에서 그다지 주목받는 소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이는 좀 특이한 일이었다.

앞으로 2회에 걸쳐 소개될 본 글은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귀향>에서부터 <허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 대중에게 소개된 ‘위안부’ 영화들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각각의 영화들은 ‘위안부’에 대한 다른 재현을 보여주었을뿐만 아니라 다른 맥락 안에서 관객을 만났고, 또 각기 다른 의미망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여기서 ‘안’은 서사와 이미지의 문제를, ‘밖’은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과 관객성을 의미한다. 물론 이 안과 밖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귀향>의 화제성과 『제국의 위안부』라는 맥락

2016년, ‘위안부’ 문제는 또다시 대중적 관심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2015년 출간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와중에 12.28 불가역적 합의가 서둘러 선언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두 가지 사건에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작품인 <귀향>이 개봉했던 것이다. <귀향>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뜨거웠다. 한쪽에서는 이 작품이 강간을 시각적 스펙타클로 구성하여 고통을 쾌락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 영화가 촉발한 감정의 역동과 그 정치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나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역사를 왜곡하고 있을 때에, 그에 반박하는 대중서사로서 <귀향>이 선보이는 식민지배와 그 폭력에 대한 저항이 이 작품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귀향>에 대한 열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이 소통되는 사회적 맥락 중 하나였던 『제국의 위안부』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제국의 위안부』와 <귀향>은 어떤 점에서 달랐던 것일까? 전자가 ‘위안부’ 피해자의 징모 과정에서의 자발성을 강조할 때, 후자는 성노예화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제국의 위안부』는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폭력이나 고통이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공유하고 있었던 가부장제의 문제이지 제국의 지배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위안부 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은 그녀들을 팔아넘긴 부모거나 그녀들을 징모하고 판매했던 조선인 포주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의 설명에 따르면 ‘위안부’ 제도는 가난한 여성들이 가족을 위해 매춘을 했던 ‘가라유키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조선 여성들의 사정은 당시 일본 매춘 여성의 사정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 사이의 동질성에 대한 주장은 중국 여성과 조선 여성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조선 여성들은 일본군 남성들의 ‘동반자이자 동료’로서 서로 정을 나누는 보호의 대상이었던 반면, 중국 여성들이야말로 일본군 남성들의 강간과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의 ‘동지적 관계’라는 상상력은 이렇게 발동된다. 그리고 이 상상력의 재료가 되는 것이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에서 발견되는 징모 과정에서의 자발성과 ‘즐거운 한때’에 대한 기억들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남한의 가부장제와 착종된 민족주의적 사유체계 및 그를 바탕으로 하는 ‘폭력적인 운동’이 ‘위안부’ 피해자를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 속에 가둬넣어야 했기 때문에 이 기억들을 지웠다고 주장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피상적으로 보편적 성체제인 가부장제만을 문제삼으면서 가부장적 군사주의에 기댄 일본 제국주의의 작동 기제에 면죄부를 주는 오류를 범한다. 이 책의 부제는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다. "기억을 '헤게모니 투쟁의 장’으로 명명함으로써" 그는 공적 기록에서 사라진 ‘여성기억’을 복원해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부장제에 기반하고 있었던 제국주의에 면죄부를 줌으로써 여성기억을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역사 다시 쓰기’로 치환해 내고 재영토화시킨다. 기실 페미니즘의 문제의식 안에서 ‘위안부’ 문제 접근하려면 일본과 조선/남한의 제국주의, 군사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가부장제와 어떻게 교차적으로 작동하였는가를 살펴야지, "가부장제가 제국주의, 군사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보다 더 근원적인 지배 체계다"라는 주장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 작업은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등장하여 12.28 불가역적 합의라는 외교정치적 사건과 협업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왜곡된 역사인식을 대중적으로 만들어냈다.

영화 &lt;귀향&gt;(2015)

 

매혹이 된 폭력, 남성으로 젠더화되는 대중

<귀향>은 『제국의 위안부』와는 대조적으로 보편적인 가부장제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예민하게 인식하면서도 ‘위안부’ 동원 체제를 성노예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관객을 이끌었다.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의 공모를 이해하면서 가부장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서로 접속시켰던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영매인 은경(최리)에게 귀신이 들리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은경이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은경의 아버지가 그를 공격하자 두 남자 사이에 싸움이 붙는다. 그리고 둘 다 은경의 몸 위에서 죽고 만다. 은경은 보편적인 성폭행 피해자이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던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영매가 된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장면에서 자신이 성폭행범을 연기함으로써 ‘위안부’ 제도를 가능하게 했던 욕망을 가진 남성으로서 속죄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잠재적 가해자’로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독의 고백은 동시에 그 ‘욕망’을 자연화시키면서 오히려 위안소 제도에 대한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더불어서 감독의 이런 태도가 영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이 영화에 드러나는 영화적 시선의 주인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남성’이 되며, 이를 따라가는 관객 역시 (반드시 그런 젠더화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으로 젠더화된다. 이때 우리는 <귀향>의 대중성을 적극적으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관객으로 하여금 <귀향>에 몰입하고 열광하도록 했던 대중성은 영화의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적 서사-이미지’(권은선)가 선보이는 선정성에 놓여 있었다. 여성의 신체와 강간을 일종의 볼거리로 만들고 그 피해의 고통을 물신화함으로써, 영화는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봉합시킨다.

물론 영화는 텍스트 내에 이미 남성적인 선정성에 대한 변명을 담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미술치료 작품에 바탕하고 있으므로 ‘사실적 묘사’에 충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양의 증언에서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성노예화 과정을 그리기 위해 강간 장면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무조건적으로 대표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이 직접적인 성폭력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과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것인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남성’들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것인지 모호해진다. 이런 의심은 <귀향>의 연작인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2018, 이하 <귀향2>)를 보면 더욱 강해진다.

<귀향2>는 <귀향>에 출연했던 한 배우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합창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은 흑백 기록 영상과 <귀향>의 컬러 영상이 교차 편집되어 있는 작품이다. 현재의 시점을 담은 흑백 영상은 사실 아무런 서사의 의미값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귀향2>는 <귀향>의 재탕에 불과하다. 영화는 전작의 성공에 기대어 만들어진 아류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류작을 통한 자기복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아류를 만들고야 마는 감독의 나르시시즘에 놓여있다. 감독은 <귀향>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위안소 첫 집단 강간 시퀀스’를 재생하면서 그 위로 ‘위안부’ 피해 당사자의 구술을 보이스 오버로 배치한다. 그 목소리를 영상 위에 그대로 입히면서 “내 영화는 피해자의 증언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재차 강변하는 것이다. 이때 피해자의 목소리를 감독의 정당성을 보증하기 위한 변명으로 전락한다. 심지어 <귀향2>는 <귀향>의 재현 영상과 현실 기록 영상을 구분하기 위해서 ‘위안부’ 피해자의 구술 기록 영상조차 흑백으로 색을 빼버린다. 관객들로 하여금 두 푸티지의 성격을 쉽게 구분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영상은 철저하게 죽은 이미지로 박제되고 도구화된다.

<귀향2>에 이르면 “과연 <귀향>은 여성영화였을까?”라는 의구심에 대한 답은 분명해진다. <귀향>은 ‘여성영화’였다기 보다는 오히려 남성으로 젠더화된 관객성에 소구하면서 남성의 이야기를 여성의 피해서사를 통해 표현한 ‘남성영화’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글쓴이 손희정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저자. <여성괴물>, <호러 영화> 등을 번역했고, <그럼에도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모먼트>, <대한민국 넷페미사>, <그런 남자는 없다>, <지금 여기에서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을들의 당나귀 귀> 등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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