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평] '나'를 찾는 김복동의 용기가 세계인권·평화운동으로 우리를 이끌다
2. [에세이] <김복동>이 남긴 것
3.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4. [에세이] 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하> - 김복동이 뿌린 씨앗
5. [포토스토리] 김복동이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영화 <김복동>
영화 <김복동>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 평화활동가로 살다 세상을 떠난 김복동이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기 위해 27년을 싸워온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2019년 8월 8일, 전국 극장에서 동시 개봉했다. 당시 우리나라와 일본은 일본발 경제 제재로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역사 부정을 손 놓고 바라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한일관계가 극한인 상황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로 살다 세상을 떠난 김복동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개봉한 것이다. 영화 <김복동>은 여러 TV 프로그램에 소개됐고, 뉴스에서도 깊이 있게 보도되었다. 관객들의 호평도 이어졌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영화'라는 후기가 주를 이뤘다. 그렇게 영화 <김복동>은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8만 9천여 명의 관객 수를 기록했다. 극장 상영을 제외한 공동체 상영만으로도 일만여 명이 넘는 관객이 영화를 찾았고, 국외 상영도 이루어졌다. 2019년 11월, 벨기에 한국문화원에서 주최한 제7회 한국영화제에 <김복동>이 초청 상영됐다. 벨기에 관객들은 영화 <김복동>은 전쟁의 피해자가 자신의 잃어버린 존엄성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다룬 영화라며 깊이 공감해 주었다. 2020년 5월에는 의미 있는 독립영화들을 선정해 상을 수여하는 들꽃영화상에서 '심사위원특별언급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심사위원 김규리 씨는 "<김복동>이야말로 들꽃영화상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렇게 영화 <김복동>은 들꽃 같은 삶을 살다 떠난 김복동의 삶과 닮은 행보를 걸어왔다.
무지(無知)
사실 나는 영화를 제작하기 전만 해도 김복동이라는 이름은 물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특별한 지식도, 별다른 생각도, 해결의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우리 역사의 억울한 피해자', '안타까운 과거의 희생자' 정도로만 피해자들을 이해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었을 때도 '한미일 삼국의 동맹 속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굴욕적 카드'라는 각종 언론의 평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내용을 잘 모르니 잘된 합의인지, 잘못된 합의인지 판단도 불가능했다. 그러다 피해자들이 '수용 불가'라는 입장을 내놓은 후에야 잘못된 합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합의에서 배제된 피해자들의 의견이 무엇인지, 그 합의가 피해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시위 현장에서 합의를 반대하는 피해자들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김복동이든 길원옥이든 이순덕이든 과거의 나에게 피해자들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할머니'였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안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2018년 10월 맑은 가을 어느 날, 내게 김복동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볼 수 있겠냐는 제안이 왔다.
시작
김복동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은 김복동이 말기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과 남은 생이 3개월이라는 것뿐이었다. 김복동은 자신의 삶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서글픔을 내비쳤고 주변에서 김복동의 생애를 되짚는 추모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나와 김복동의 인연이 시작됐다. 촛불이 꺼져가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김복동의 삶을 어떻게 표현할지 선뜻 생각나지 않았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27년을 살아온 김복동의 삶이 궁금했다. 특히 나는 김복동이 죽기 직전 삶에서 반드시 되찾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이라 믿었고, 작업을 통해 그 순간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제안한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전 대표를 만나 논의하며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했다. 김복동이 기록된 모든 자료를 요청해 받았고, 그와 동시에 기획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의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지, 어떻게 그릴 것인지 생각을 거듭했다.
나는 김복동의 흔적들을 통해 그의 생애를 살폈다. 1992년, 처음 자신을 피해자로 신고한 때부터 김복동의 활동 기록을 확보했다. 2011년 '희망승합차' 선물을 계기로 김복동과 수년째 가족처럼 생활한 미디어몽구를 통해서도 김복동의 기록을 확보해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뉴스타파 데이터 팀 김강민 기자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사건 위주로 정리해 타임라인으로 정리했다. 김숨 작가가 쓴 김복동의 자전적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를 읽고, 김복동을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들을 수집했다. 조금씩이지만 김복동의 세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인사
작업을 먼저 시작했지만, 김복동을 직접 만나 인사해야 했다. 그러나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김복동의 몸 깊숙이 자리 잡은 암 때문이었다. '평화의 우리집'을 방문해도 김복동은 늘 2층 방에 누워 진통제를 먹고, 링거를 꽂은 채 암과 싸우고 있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을 골라 다시 약속을 잡아보자는 '평화의 우리집' 손영미 소장의 말에 다시 약속을 잡았지만, '병세가 악화돼 새벽에 응급실행'이라는 문자로 약속은 또 무산됐다. 그렇게 병원을 찾아도 김복동은 누워만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다음에 다시'라는 말로 또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한동안 나는 김복동에게 내가 누구인지 소개할 수 없었다. 그러던 2018년 11월 말, 김복동을 만나게 됐다. 그날 김복동은 재일조선학교에 재산 5천만 원을 기부하는 행사를 열었다. 행사라고 해봐야 활동가들과 미디어몽구, 내가 참석자의 전부였다. 방 안에는 김복동과 함께 오랜 시간 함께해 온 활동가들이 김복동 주변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었다. 김복동은 스웨터를 걸치고, 다리 위에는 이불을 덮은 채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빗어져 정돈되어 있었다. 그렇게 김복동은 고요히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낯설었다.
나는 김복동의 방문 바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알 수 없는 죄스러움이 김복동의 공간에 들어가려는 나를 막았다. 지난 세월, 김복동을 비롯한 피해자들을 너무 모르고 살아온 게 죄송해서였을까. 당사자를 앞에 두니 모르는데 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더 부끄러웠다. 행사가 끝나고 김복동에게 전 재산을 재일조선학교에 기부한 마음이 어떤지 물었다. 여전히 방 밖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채였다. 김복동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만점이지"라고 말했다. '만점?'하고 나는 생각했다. 바로 "왜요?" 물었다. 김복동은 조금 생각하고,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이 하잘것없는 나를 이렇게 받들어줘서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는데 모두들 이렇게 모여 있으니 고맙지"라고 김복동은 대답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짚을 수가 없었다. 그저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김복동과 활동가들의 끈끈함, 희생, 마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다만, 확실하게 알 것 같은 것도 있었다. 김복동이 오늘 한 말들이 김복동의 유언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문득, 오늘이 지나고 나면 더는 김복동은 앉아서 말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유언 같은 말을 마친 김복동은 힘이 든 듯 이내 자리에 누웠다. 조금 힘들더라도 꼭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왜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질문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기어이 다시 누운 김복동에게 물었다. 김복동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잠시 가만히 생각한 후, 곧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보고 있으면 그냥 눈물이 나는 학생들의 모습. 실제 김복동은 2018년 6월, 장학금 전달식에서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보고 갑작스레 눈물을 흘렸다. 나는 김복동의 대답이 의미하는 것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이 혹시 김복동이 찾고 싶은 순간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김복동의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흔적
2019년 1월, 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2018년 6월 '김복동 장학금'을 받은 교토조선중고급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학교는 교토 외곽의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낡고 초라해 보이는 학교에서 교복으로 한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2010년 이후, 일본 정부는 고교 무상교육 정책에서 유일하게 재일조선학교만 제외했다.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은 조선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모든 학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김복동이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김복동의 도움으로 학생들은 걱정 없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학생들을 인터뷰하기 전, 생사를 넘나들며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김복동의 현재 상태를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말의 이유를 찾고자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눈앞에 있는 학생들은 열여섯, 열일곱의 앳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문이 막혔고, 눈물이 막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슨 슬픈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었고, 그냥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혼자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인데 눈물이 났다. 한참을 기운이 쏙 빠지도록 울었다. 그때 김복동의 말, '그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했던 것 같다.
김복동은 눈앞의 학생들을 바라보며 전쟁터로 끌려가던 열여섯 김복동,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일본에서 차별을 받으며 사는 조선인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김복동을 마주한 것이다.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학생들의 모습에서 저절로 그때 김복동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날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김복동 다큐멘터리에 나도 모르는 사이 진심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일이 아닌, 마음으로 영화 <김복동>을 대했다. 그렇게 일본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김복동이 있는 병실을 찾았다. 이제는 진통제가 없이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는 김복동에게 학생들이 전한 편지를 전달해주며 또 울었다. 눈이 아프게 울었다. 며칠 후, 김복동은 세상을 떠났다.
발자취
겨울에 김복동이 세상을 떠나고, 곧 귀룽나무가 잎을 틔우며 봄이 왔음을 알렸다. 산수유나무, 생강나무, 매화나무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고 진달래꽃이 온 산을 분홍빛으로 뒤덮었다. 그렇게 생명이 움트기 시작할 때 김복동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바다가 보고 싶다던 김복동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부산 다대포를 찾아 김복동의 바다를 느꼈고, 그곳에 여전히 살고 있는 김복동의 동생도 만났다. 다대포 바다 앞에서 김복동과 함께 장사를 했다는 여든다섯의 횟집 사장을 만났고, 통도사 백련암에 김복동이 내세를 위해 세웠다는 석등을 찾았다. 김복동과 함께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김복동에 관해 물었고, 김복동의 활동 너머에 숨겨진 마음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김복동이 그렇게 싫어했던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요구하며 기습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을 만나, 경찰에 잡혀갈 걸 알면서도 시위를 강행한 이유를 물었다. '평화의 우리집' 2층 김복동의 방을 찾아 김복동이 떠난 김복동의 방을 바라봤고, 김복동의 눈높이와 시선으로 집 안팎도 살폈다. 김복동의 흔적은 곳곳에 있었다.
김복동과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한 바다는 부산의 다대포 앞바다다. 다대포는 낙동강 하구에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있다. 직접 찾은 다대포 바다는 바람이 강렬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거센 바람이었다. 바람은 바다 저 멀리 지평선 부근에서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는데, 한참을 달려온 바람은 다대포 해안에서 모래와 만나 모래바람이 되었다. 거센 모래바람은 아팠다. 김복동이 보고 싶다던 바다는 고요한 바다가 아닌, 모래바람이 온몸을 때리는 아픈 바다였다. 이 다대포 바다에서 김복동은 수십 년의 삶을 견디고 버텨야 했다. 아픈 바다의 바람을 맞으며 김복동은 자신의 아픔을 잊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김복동은 힘든 시간이 몰려오면 늘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한 걸까. 어쩌면 다대포의 이 거센 모래바람이 그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래사장에 켜켜이 쌓인 모래의 물결은 그렇게 쌓이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기적처럼 살아 돌아와 나이를 가늠하지 못한 김복동에게 “언니 나이는 23살이야”라고 알려준 사람은 김복동보다 세 살 아래인 동생이었다. 동생은 김복동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서 아들, 조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동생은 2010년 김복동이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함께 활동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 "힘든 데 뭐하러 가느냐, 가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했다. 동생은 정대협을 단체가 아닌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자꾸 “정대협 씨”라고 말했다. 동생은 그래도 정대협 씨가 마지막까지 장례를 잘 치러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정대협은 사람이 아니라고 굳이 말하지 않았다. 동생은 정대협 씨를 따라나선 김복동이 자신에게 한 말을 우리에게 전해줬다. "앞으로 이 땅에 나와 같은 피해자가 없어야 하기에 가는 거다"라는 김복동의 마지막 말이다. 그날 이후 김복동과 동생은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았고, 동생은 김복동의 죽음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알았다. 몸이 불편해 장례식장을 찾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취재진이 내려와서 이렇게 이야기라도 하니 고맙다고 말했다. 동생은 마지막으로 김복동이 다음 생애에는 좋은 부모 만나 전쟁터에 안 끌려가고, 결혼해 아이도 낳으며 평범하게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복동은 생애 자신이 겪은 고통의 원인이 전생 때문이라고 믿었다. 전생의 업보가 내세에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김복동은 1998년 통도사 백련암에 석등을 하나 세웠다. 생전 김복동의 방에는 이 석등이 찍힌 빛바랜 사진이 놓여 있었다. 다른 사진도 아닌 석등 사진을 왜 이렇게 소중히 간직했을까. 그 사진 속 김복동의 석등을 직접 찾아가 확인했다. 불교 신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긴 석등을 세우는 이유는 지난 업보를 지우고,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밝혀주는 의미라고 백련암의 큰스님이 말했다. 김복동이 1998년 이곳에서 석등을 세우던 때의 일을 큰스님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석등 지대석을 가린 잔디를 손으로 살짝 걷어내자 한자로 '丙寅生 金福童(병인생 김복동)'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새벽녘, 김복동의 석등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김복동처럼 빛을 밝히고 있었다.
마음
김복동과 인간적인 교류가 없던 나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와 그 속에 남겨진 김복동의 흔적을 통해 김복동의 이야기들을 찾아갔다. 김복동이 걸어온 길을 살피며 누구보다 김복동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애썼다. 또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김복동의 활동과 의미를 짚어 나갔다. 나는 그렇게 김복동이 탄 배의 행적과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살폈다. 김복동이 없는 김복동의 영화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영화 <김복동>을 본 관객들은 김복동을 비롯한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고 했다. 아흔이 넘어서도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한 김복동의 책임감, 사명감, 의무감을 보며 관객들은 '당사자가 저렇게 노력할 때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었나'하는 생각을 떠올렸다고 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김복동,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되어주시겠습니까'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삶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저 피해자 중의 한 명이 아닌, 또렷한 이름을 지닌 주체로 '김복동'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목도 '김복동'으로 결정했다.
이름
지금도 나는 영화 <김복동>을 떠올리면, 전국 방방곡곡을 기차로 버스로 구석구석 누비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물들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중력을 거스르며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를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영화 <김복동>에 보인 관심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관객들에게 늘 "영화 <김복동>은 관객 여러분의 마음속에 김복동이라는 이름이 기억되고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평생을 들꽃처럼, 들풀처럼 살다 떠난 김복동의 이름이 영원할 수 있도록 김복동의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영화를 본 관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김복동의 이름을 새기기 위해서.
다시 8월
영화 <김복동>이 개봉하고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처음 영화 제작을 시작했을 때, 김복동이 누군지도 제대로 몰랐던 나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저 김복동의 발자취를 짚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욱 구체적인 기획을 하게 되고, 김복동을 만나고, 알게 되고, 김복동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이성보다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다. 마음을 다해 제작하는 것의 의미를 나는 제작을 진행하는 동안 알게 되었다. 김복동이 그랬던 것처럼 몸이 부서지더라도 끝까지 제대로 해야 한다는 사명감, 그것 하나로 임했다. 그렇게 일 년이 넘도록 영화 <김복동>에 몰입해 있었다. 2020년이 되어 이제 슬슬 김복동의 삶에서 빠져나오려는 때, 김복동이 '돈벌이에 끌려다닌 불쌍한 노인네'라는 말을 접했다. 그 누가 김복동의 마음과 행동을 함부로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을까. 그 말과 글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요동치고 몸서리가 쳐졌다. 김복동이 떠나자, 김복동을 지우려는 사람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북적였다. 이름을 지우고, 흔적을 지우며, 의미를 없애버리려는 듯 보였다. 그들이 그럴수록 나는 김복동을 떠올렸다. 삶의 마지막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외치며, "아베는 나한테 졌다"고 말하던 김복동을 떠올렸다.
2019년 1월 28일, 김복동이 세상을 떠난 후 숨을 거둔 김복동의 손을 잡았다. 심장은 멈추었지만 김복동의 손에는 여전히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날 나는 세상을 떠난 김복동의 손을 잡고 그의 얼굴 가까이에서 나지막이 얘기했다. "할머니, 편히 쉬세요. 영화 잘 만들게요. 할머니 이름, 많은 사람이 기억하게 할게요."
나는 지금 김복동의 이름을 지우는 자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 서 있다. 그때마다 다짐하듯, 죽었지만 살아있던 김복동에게 한 약속을 꺼내 본다. 그리고 감히 말한다. 너희들이 그 이름을 지우려 할수록, 김복동의 이름은 들꽃이 되어 세상 곳곳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더 높이 더 멀리 솟아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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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송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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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생. 2003년 시사교양 PD로 방송 생활을 시작했다. 2013년부터 뉴스타파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친일파 후손,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리 등을 다룬 시사 다큐멘터리를 다수 제작했다. 2019년 연출한 영화 <김복동>이 8월 전국 극장 동시 개봉하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역사 속에 숨겨진 '이름'을 다룬 작품을 앞으로도 꾸준히 제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