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사람들과 '위안부' - 기억을 공간화하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는 사람들 <상>

홍윤신

  • 게시일2020.10.07
  • 최종수정일2020.10.15


할머니, 혼, 그리고 오키나와 
 

"할머니의 집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고국(故國)에 대해서 할머니는 그리 기쁜 추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이라고 고국보다 나은 추억이 있을까. 나는 또 문득 전후(戰後)에 유령이 되어 떠돌았다는 소문의 '하루에'를 떠올렸고 그의 유골을 고국의 '망향의 동산'에서라도 쉬게 해줄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 1981년 9월3일자 한국일보, 끌려간 사람들 <8> 韓‧日歴史(한‧일 역사)의 彼岸(피안)을 캐는 現地調査(현지조사) - 寃魂(원혼)되어 떠돈다는 挺身隊(정신대)유골 「望郷(망향)의 동산」에 묻어 줄 수 있을지… 


윤정옥은 최초의 '위안부' 연구자이다. 위 기사에서 윤정옥이 말하는 할머니는 전후에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 오키나와에 남은 배봉기이다. 배봉기는 김학순의 증언이 있기 16년 전 오키나와에서 존재가 확인된 '위안부'피해자였다. 1975년 당시 일본에서 배봉기의 이야기는 실명이 아닌 A씨로 보도되었다. 배봉기는 왜 A라는 이니셜로 자신의 과거를 말해야 했을까?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지상전이 벌어졌던 오키나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27년간 미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미국의 통치 하에 있던 오키나와는 1972년이 되어서야 일본 행정구역 안으로 편입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5년, 오키나와에서는 전쟁 때 강제로 끌려왔다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어려운 삶을 이어왔던 조선인 여성 한 명이 불법체류자로 추방된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바로 배봉기의 이야기였다. 배봉기는 불법체류자로 추방되는 것을 피하고자 익명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배봉기를 위한 청원 활동과 신분 보증 등의 협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배봉기는 예외적으로 체류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1980년, 윤정옥은 일본의 입국관리소가 '위안부'였던 여성 A씨에게 특별히 체류허가서를 내주었다는 기사가 실린 1975년 10월 22일자 석간 『류큐신보』를 손에 쥐고 오키나와에 방문했다. 당시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에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활동을 해온 재일조선인 김수섭, 김현옥이 배봉기를 보살피고 있었다. 당시는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이어간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조총련의 도움을 받는 일본의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간 윤정옥은 정부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정부의 감시를 받았던 경험 때문일까. 윤정옥은 1990년에 설립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 이하 정대협)를 운영할 때, 정부가 주는 보조금을 거부하고 독립적으로 기관을 운영하며 재정적 어려움을 감수하였다. 한편, 일본 사회는 오키나와에서 들려온 배봉기의 이야기를 일본 사회 내의 첫 번째 '위안부' 증언으로 여론화하지 못한 채 김학순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정옥은 배봉기 등을 취재한 기록을 정리해 1990년 한겨레 신문에 4차례에 걸쳐 글을 연재했다. 이를 통해 배봉기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배봉기처럼 오키나와에 끌려와 본명을 찾지 못한 채 죽어간 '하루에' 같은 여성들의 이야기도 전해졌다. 이후 '위안부' 문제 진상규명을 위한 증언 조사의 시작과 함께 추모비 건립이 추진되었다.

'위안부' 문제 가시화 초기에 한국 국회가 주목한 것은 생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었다는 점도 상기해야 하리라. 1991년 10월 24일, 대한민국 국회의사록에서 처음으로 '위안부'(당시에는 정신대라고 호칭함) 문제가 <정신대문제대책에 관한 청원의견지시의 건>이라는 문건으로 공식 등장했다. 독립기념관에 정신대 희생자위령비를 건립하는 안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애국선열의 시비나 어록에 한하여 건립부지를 허가해 왔던 독립기념관은, 정신대 위령비 건립에 대해서는 부지의 포화 상태를 이유로 불허했다. 이에 대해 문화공보위원회는 추후 일제강점기 희생자 비석을 세울 때 정신대 문제가 포함되어야 된다는 청원의견을 의결했다. 이것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대한민국 국회의 첫 번째 기록이다. 죽은 자와 산 자, 진상규명과 추모 공간, 연구와 운동 등 모든 것이 맞물리며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어떻게 '위안부' 문제와 만났고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은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첫 번째 '위안부'로 기억하지 못했던 배봉기를 기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975년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로의 '복귀 불안'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전쟁 책임의 문제로 배봉기를 기억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억하고 전하려 했는가를 기록하고자 한다. 
 


1992년, '위안소' 지도를 만들다


윤정옥이 1981년 한국일보 기사를 통해 배봉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지 10년이 지난 1991년에야 한국 사회는 첫 번째 증언자를 만났다. 자신의 실명을 밝히고 피해사실을 증언한 김학순이다. 배봉기는 김학순의 증언이 있던 그해 10월에 숨을 거두었다. 두 피해 여성은 서로 만날 수 없었으나, 정대협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안부도 주고받았다. 배봉기는 긴 삶의 여정 끝에 자신과 같은 체험을 증언으로 승화시킨 용기있는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1991년 12월, 김학순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3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첫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일본 내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법적 배상과 공식사죄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는 김학순의 등장이 전혀 다른 방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 오키나와 여성사 연구그룹은 획기적인 지도를 발표한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20주년을 되돌아보는 심포지엄에서 오키나와전 당시 오키나와에 설치된 121개의 '위안소'[1] 위치를 표기한 지도를 발표한 것이다.  




이들이 김학순의 증언 후 불과 1년여 만에 121개의 '위안소'(현재146개소)위치를 지도[2]에 표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키나와 전장의 기억을 다룬 증언집들이 일본 본토로 복귀한다는 정치적 '불안감'이 증폭된 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발간되어왔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현사 제9권 오키나와전 기록1』(1971년),『오키나와 현사 제10권 오키나와 전 기록2』 등은 주민의 관점에서 오키나와전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들 속에서 '위안부'에 관한 기억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1992년에 이은 후속 조사에 의해1994년에는 약 130곳의 '위안소'가 지도에 표기되었다. 또 다카자토 스즈요, 고가 노리코, 홍윤신 등이 이어간 증언 조사와 연구를 통해 2020년 현재에는 총 146곳의 '위안소'가 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왜 지도였을까? 1992년 당시 지도 작성 및 증언 조사의 중심 멤버였던 가카즈 가츠코는 김학순의 증언 직후 숨을 거둔 배봉기에 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억이 이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배봉기의 존재를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오키나와 여성들을 움직였다는 것이다.[3]

한국과 일본 내 '위안부' 문제 운동 전개 방식이 피해 당사자의 증언을 동력으로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키나와 여성들은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를 목격한 주변부의 기억들을 운동의 중심에 두었다. 그들은 여전히 오키나와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모를, 제2의 배봉기들의 삶이 침해받을 가능성을 염려했다. 좁은 섬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내는 것이 오히려 피해자들의 평온한 삶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문제의식이 이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피해 당사자가 아닌 피해 목격자의 증언을 찾고, 폭력의 장소였던 '위안소'를 전쟁책임의 소재로 표기하는 새로운 운동으로 이어졌다. 지도 위의 점들은 전쟁책임의 소재를 목격한 표식이기도 했다. 그 표식 안에 전쟁 당시 침묵했던 자신들의 가해성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녹아 있다. 1992년 이후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본제국에 의한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조선인에 관해서는 가해자라는 문제의식을 구체화했다. 오키나와 '위안소' 지도는 '위안부'를 기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기억의 공간화'로 이뤄낸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 속의 기억을
그림과 향토사로 그려내는 사람들 


그렇다면 1992년 당시 오키나와 여성사 연구그룹이 '위안소' 지도를 그릴 수 있도록 한 오키나와 주민의 증언은 어떤 것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오키나와 여성사 연구그룹이  '위안부'나 '위안소'를 본 적이 있는지,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지만을 질문하고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목격 증언을 통해 자신들이 겪은 전쟁 체험을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본 풍경,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배경이었던 마을과 학교, 산 등이 어떻게 일본군의 진지로 변했는지, 그리고 자신은 또 어떻게 총력전에 동원되어 어떤 폭력을 경험했는지를 증언했다. 그 가운데 '위안소'에 관해서도 설명하게 되었다. 이때 전혀 의도치 않은 지점에서 '위안소'의 위치를 특정한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다. 오키나와 요미탄촌에서는 주민들에게 자신이 태어난 집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고, 당시 함께 살던 사람들의 상황을 설명해 전쟁피해를 드러내도록 했다. 이 작업을 할 때 일본군이 집을 빼앗아 '위안소'로 삼아버려 살 곳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의 집이 지도에 표시되었다. 『요미탄촌의 각 마을 전시 상황도 및 집 이름 등의 일람표(読谷山村の各字戦時概況図及び屋号等一覧表)』(요미탄촌사편찬위원회, 2002년)는 일본군이 비행장 근처의 마을이나 산악지대에 숙소를 짓고 주민들이 살고 있던 민가를 접수해 '위안소'를 설치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다수의 민가가 군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위안소'로 접수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위안소'라는 공간이 주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지 가늠하게 한다. 일본군에게 집을 빼앗긴 주민들은 자신들의 전쟁 체험을 증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전시하 감금 상태에 있었던 여성들의 삶도 증언하게 된 것이다. 

그림으로 남아있는 '위안소'도 있다. 요미탄촌 기나 마을의 『기나 향토사(喜名誌)』의 편집위원 미야하라 료슈(1924년생)는 자신의 전쟁체험과 함께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여러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그 안에는 '위안소'로 사용된 '오키쿠'라는 빨간 기와집을 그린 그림[4]이 있다. 미야하라는 자신의 그림 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특공병사(特攻兵)의 숙박소
기나 마에바루의 사탕수수밭 근처에는 요리점 풍의 빨간 기와집이 있었습니다. '오키쿠'라고 불린 이 집은 항공병의 숙소였습니다. 내일의 목숨이란 게 없는 항공병들이 부르는 구슬픈 군가가 매일 밤 흘러나왔습니다."

 

미야하라가 그린 빨간 기와집 오키쿠는 마을에서 떨어진 밭 한가운데에 있었다. 민가의 목재까지 징발해 멋지게 지은 요리점 풍의 오키쿠는 미군의 표적이 됐고, 지은지 2개월 후인 1944년 10월 10일 미군의 나하 공습으로 흔적 없이 불에 타버렸다. 오키나와에서는 민가가 '위안소'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는데, 전쟁 중에 '위안소'로 사용된 시설과 성병 검사로 쓰인 병원 등은 미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미야하라의 그림은 이후 『요미탄 촌사 제5권(자료편4)─전시기록(상권)』(2002년)의 <여성들의 오키나와전 체험> 편에 요미탄촌 전체의 '위안소'와 함께 소개되었다. 오키나와전 생존자가 자신의 전쟁체험을 전쟁 후에 향토사(喜名誌, local history) 편집위원이 되어 기록으로 남겼고, 그것이 또 작은 마을이 속한 지역 단위의 오키나와전 상황을 보여주는 편찬 기록에 반영되었다. 이는 주민의 시점으로 오키나와전 전체 상황이 기술된 사례이다.

전후에 미군의 군사시설이 들어와 완전히 사라진 마을도 있다. 『고완마을 향토사 -오키나와전 미점령하의 잃어버린 부락의 복원 (小湾字誌─沖縄戦・米占領下で失われた集落の復元)』(1995년)은 현재 미군 군사시설의 설립으로 사라져 버린 고완이라는 마을의 전쟁 전 모습을 그림으로 복원해 놓았다. 1989년 호세(法政)대학 오키나와 문화 연구소와 고완마을 향토사 조사위원회, 우라소에시 고완 마을 향토사 편집 위원회는 공동으로 대대적인 증언 조사를 시행했다. 증언을 통한 데이터 수집과 복원에 참여한 사람들만 1500명이었고, 800명 이상의 주민 증언에 의해 당시의 집, 마을 풍경, 성지, 공동시설, 담의 위치, 정원의 풍경 등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 그림으로 복원되었다. 그 안에는 '위안소'에 관한 기억도 존재한다.



그림으로 복원된 고완마을[5]을 보면 해안가에 궁(宮)이라고 표시된 류큐 왕족의 아름다운 별장(빨간색 점선 원)이 있었고, 이 별장이 '위안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키나와의 전통문화와 관계된 장소가 군사시설의 하나인 '위안소'로 이용됨으로써 파괴된 것이다.


오나하(小那覇)라는 마을에서는 지도[6]에 일가족이 모두 사망한 집에 검은 점(●)을 그려 넣었다. 오나하 마을은 일본군이 설치한 비행장 옆에 있었는데, 이 마을의 검은 점이 표기된 집들 사이에도 위안소가 있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위안부'에 관한 기억은 '위안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자하 리츠코(1932년생)는 전쟁 고아였다. 그녀는 오키나와 북부에 설치된 미군의 민간인 포로수용소(수용지구)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와 함께 생활했다고 증언했다. 자하리츠코는 당시 미군이 '위안부'들만 따로 모아 민간인 수용소 안의 고아원에서 자신과 같은 전쟁고아들을 돌보게 했다고 한다.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은 아기들은 영양실조에 걸려있었고, 밤새 서럽게 울다 다음날이면 싸늘하게 죽어갔다. '위안부'들은 이 어린 주검들을 나무 상자에 담아 묻어 주었다고 한다. 수용소 안의 고아원이던 집에는 지금도 주민이 살고 있다.[7]

이처럼 전쟁으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들이 빼앗겼던 일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군사폭력과 전쟁의 아픔으로 '위안소'와 '위안부'는 실체화되었다. 주민들은 총력전 하에서 군에게 노동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집도 '위안소'로 빼앗기는 상황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위안소'와 '위안부'들을 목격했고 그 폭력의 현장들을 자신의 체험으로 기록하고 있다. '위안소'와 '위안부'를 본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억은 현재 눈 앞에 보이는 군사기지와, 보이지 않는 과거의 군사기지라는 장소성을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

  1. ^ 이 글에서의 위안소는 일본 군부, 군인과 군속, ‘위안부’, 오키나와 주민 등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이 겹쳐지고 지속되는 장소를 의미하기에 따옴표 처리를 하였다.
  2. ^ 출처 : 전국여성사연구회교류 모임 실행위원회, 『제5회전국여성사연구회 교류 모임 보고집
    (第5回全国女性史研究会交流のつどい報告集)』, 보고집편집위원회 편, 1994년.
  3. ^ 2003년 10월 9일, 나하(那覇, 필자와의 인터뷰)
  4. ^ 출처 : 홍윤신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인팍토 출판회, 2015년, 164쪽
  5. ^ 출처 :『고완마을 향토사-오키나와전 미점령하의 잃어버린 부락의 복원 (小湾字誌─沖縄戦・米占領下で失われた集落の復元)』,호세대학 오키나와 문화연구소, 고완마을 향토사 조사위원회, 우라소에시 고완마을 향토사 편찬위원회, 1993년, 43쪽
  6. ^ 출처 : 홍윤신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 인팍토 출판회, 2015년, 249쪽. 
  7. ^ 2007년 10월 6일, 오키나와 나고시(名護市, 필자와의 인터뷰)

연결되는 글

글쓴이 홍윤신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 객원연구원. 2004년부터 12년간 오키나와전의 '위안부' 문제를 조사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오키나와전의 기억과 위안소(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 (2015, 인팍토 출판회) 및 "Comfort Stations" as Remembered by Okinawans during World War II(2020,Brill)를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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