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옥(1925년~ / 영문학자, 인권운동가)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찍부터 ‘위안부’피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1980년부터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다니며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주최 ‘국제 관광문화와 여성(일명 기생관광) 세미나’에서 정신대 답사 보고를 하고 1990년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취재기를 연재하면서 이 문제가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 공동 대표를 역임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세상에 알리고 그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 온 선구자. 저서로 『平和を希求して : 「慰安婦」被害者の尊嚴回復へのあゆみ』 『朝鮮人女性がみに 「慰安婦問題」 : 明日をともに創るために』 등이 있다.
“지금도 내가 느끼는 거는.. 남의 일같이 생각하는 사람, 위안부 이렇게 떠들어도 관심 없는 사람들 아직도 많아. 내가 안 당했고, 내 딸이 아니니까. 근데, 혼자 공부 잘 해가지고 PhD 되고 월급 많이 받고 이게 아니라, 나 혼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다른 사람이 있어서 내가 있는 거야.”
지난 2월 14일, 웹진 <결> 편집팀은 서울 등촌동의 한 실버타운을 찾았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웹진의 시작점에서 가장 먼저 찾아뵙고 소식을 알리고 말씀을 듣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라도 주저 없이 떠올릴 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한 선구자,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기대감과 떨림을 안고 찾아간 노학자의 집은 조용하고 정갈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아흔을 넘긴 연세로 왕성히 활동하던 시절보다는 쇠약해진 모습이었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에서 치열했던 평생의 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터뷰는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와 후학에게 전하는 메시지 중심으로 짧게 진행되었다.
같은 시대, 같은 여성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를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영문학자로, 대학교수로 편안히 살 수도 있었던 그를 평생 뜨겁게 움직이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난 소설 전공이었거든. 19세기 전공이었는데, 문학에 관심 많았기 때문에 단체 일이나 사회사업 같은 건 관심도 없었어. 그런데 개인 개인을 만나게 되잖아. 만나고 보면 그렇게 기가 막히고, 생각도 못 할 이야기들이…... 이건 내가 아는 소설, 소설 아무것도 아니야.”
해방 직후, 윤정옥은 정신대로 떠났다던 여성들이 도무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않는 여성들에 대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던 1970년대, 『분노의 계절』이라는 책이 도화선이 되어 스스로 이 문제를 파헤쳐 보기로 했다. 길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지만,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찾아다니던 중, 1980년 오키나와에서 배봉기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수년간 답사를 하고, 증언과 자료를 모으며 개인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1988년 4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주최한 국제세미나 ‘여성과 관광문화’에서 <정신대와 우리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실태를 발표했고,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조사를 위해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산하에 정신대연구위원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소설 속에서 삶의 속살과 진실을 발견하는 데에 매료되었던 영문학자였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소설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며 윤정옥은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참담하기도 했지만, 이 문제가 벌어지게 된 배경에 복잡하고 끈끈하게 얽힌 전쟁, 계급, 빈곤, 사회 구조와 여성 차별의 고리들을 생생히 발견하면서 은퇴 이후에 인간사에 대해 다시 눈을 떴다고 회고하는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솔직한, 학자로서의 고백이었다.
“내가 미안하잖아……”
1925년에 태어난 윤정옥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3년, 정신대 소집장이 어김없이 날아왔지만,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 아버지의 판단으로 바로 학교를 자퇴하고 온 가족이 피난을 떠나 겨우 고난을 면했다. 전쟁이 끝나고, 끌려간 남자들은 돌아왔지만 끌려간 여자들은 소식조차 알 수 없이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피해간 어떤 문제를 나와 같은 이들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무게감, 학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 알아내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양심과 책임감,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공감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더라,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오면 깜짝 놀라서 알아보고 말이지. 그 얘기 들으면 어떡할 수가 없어. 안 찾아다닐 수가 있어? 찾아다니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그에게 “내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교수 재임 동안에는 틈틈이 방학 기간에 사비를 털어 답사와 연구를 이어 갔고, 은퇴 후에도 멈추지 않고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되었다. 윤정옥은 김신실, 김혜원과 함께 현장답사 조사위원을 꾸려 일본, 타이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답사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례를 수집했다. 생생하고 절절한 조사 내용은 1990년 1월, 한겨레에 <정신대 발자취 취재기>라는 제목으로 한 달 동안 연재되었고, 우리 사회에 폭넓은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해 7월 윤정옥은 그의 서재에 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던 학생(여순주, 야마시다 영애, 이상화, 조최혜란)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문제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진상 규명이 우선이라는 공감대 위에서 거침없이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정신대연구회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 면담을 통해 구술 채록을 진행하고 구술집(증언집)을 간행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피해자 증언 녹취와 피해 실태 조사를 주도하는 한편 국외 거주 피해자 발굴과 국적회복 사업에도 힘썼다. 그는 한국정신대연구소 활동과 함께 1990년 11월 37개의 여성단체가 모여 설립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공동대표로서 운동을 활발히 주도했다.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다가가는 것
아무도 거론하지 않고 수십 년간 묻어왔던 문제를 처음으로 드러내고, 국제 사회에서 이슈화하고, 피해자의 인권과 존엄을 되찾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온 길이 절대 쉽지 않았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어려운 게 어딨느냐’며 그는 오히려 “내가 창피하고 미안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글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런 얘기 들으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거 같아. 누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면 말이지. 본능적, 거의 본능적으로 뛰어드는 거야. 의지가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문제, 증오와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 공감의 문제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윤정옥은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은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 문제 또한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할 한국이 도리어 가해국이 되었다는 점이 더욱더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었다. 정대협 공동대표직을 내려놓은 이후 2006년, 개인 자격으로 베트남으로 향했다.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 2세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으로 사죄의 말을 전했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향했던 십수 년간의 외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고 연대하게 된 일본의 연구자와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주한 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한번 새로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990년 책상 하나에 전화기 한 대로 정대협의 막연한 여정을 시작했듯이, 이번에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시민연대 출범을 제안한 것이다. 그 목소리에 호응한 국내와 베트남 현지의 많은 단체는 2000년대 이후 지속해서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와 그들의 2, 3세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며 전쟁으로 침해된 여성 인권 회복을 위해 달리고 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 인권과 평화가 회복되기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는 베트남전 성폭행 피해자 2세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해 “당분간 내 집에서 머물더라도” 한국에서 아버지를 만나도록 돕고 싶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들의 아픔에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부의 입장과 외교적 관계, 정치의 논리가 아니라 여성 인권과 평화의 차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베트남전 피해자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할 것을 외쳐온 윤정옥의 노력은 최근 들어 느리나마 결실을 보고 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과 단체들이 십수 년간 활동을 이어온 결과, 지난 2018년 4월 서울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 법정’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과 성폭행 문제도 아직은 풀어야 할 단단한 매듭이 많이 남아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연구자들과 현장에서 포기하지 않는 활동가들, 그리고 이들에게 관심과 지원을 보내는 시민들이 계속 뒤를 이어나가기를 기원하고 기대해 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발견과 공감
“내가 아무리 공부 잘 해가지고 에이플러스 받아서 하버드 나오고 런던대 나오더라도, 나 혼자 살 수 없는 거야. 꼭 내 주위에는 같은 사람이 있어. 나 혼자만 잘된다는 생각, 그건 버려야 할 거 같아. 내가 있으면 누가 있지. 남자와 여자가 있는 것 같이, 동서남북이 있는 것 같이. 동이라는 것은 서가 있어야 동이야. 남이라는 건 북이 있어야 남이야. 혼자 절대로 있을 수 없어. 우리가 그거 알아야 할 거 같아.”
연구자로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성취나 성공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윤정옥.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눈을 열고, 공감하고, 서로가 있음에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조용했지만 뜨거운 여운을 남겼다.
Interviewer : 소현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
Interviewee : 윤정옥
정리 : 슬로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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