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상> - 단상 위의 김복동

웹진 <결> 편집팀

  • 게시일2020.08.11
  • 최종수정일2020.08.12

 

 

늘 꼿꼿했던 그녀의 등을 기억합니다 

류광옥 (법무법인 가로수 변호사, 웹진 결 편집위원)


이 글을 쓰기 위해 우선 떠오르는 것들을 낙서처럼 적어 봤습니다. 수요시위, 재일조선학교,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나비기금……. 상당히 많은 단어가 떠올라 메모지가 금세 채워졌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까? 고민하며 메모에 적힌 단어들을 다시 살펴보다가 메모지에 '등'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메모지에 빼곡히 적혀 있는 다른 단어들과는 달리 왜 '등'이라는 단어를 적었는지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큐멘터리 <김복동>을 본 많은 사람이 울었을 겁니다. 조금 울거나 영화 내내 울거나.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울 수 있는 만큼 울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큐멘터리 <김복동>에서 제게 가장 마음 아프게 다가왔던 것은 그녀의 '등'이었습니다. 아흔을 넘긴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곧게 뻗은 그녀의 등과 목, 그녀는 자세에서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을 때조차도 그녀는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허리를 세우고 꼿꼿이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그녀의 등에 유독 눈길이 갔던 이유는 저의 어머니 때문이기도 합니다. 10년 전 수술을 받은 곳이 덧나면서 얼마 동안 누워계신 후 다시 일어난 어머니의 등은 완만하게 굽어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등 펴셔요", "바로 앉으려고 해 보셔요" 계속 재촉하게 됩니다. 

제가 그녀의 옆에 있었다면, 지금 그녀가 제 옆에 있다면, 저는 그녀에게 등을 펴라는 재촉은 하지 못하겠지요. 불필요한 말일뿐만 아니라, 아마 오히려 그녀가 제게 "등 좀 펴라" 핀잔을 줄 것 같습니다.

 

단상 아래의 김복동

윤지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자료팀장)


나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하 박물관) 자료실에서 자료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박물관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산하 기관이다. 올해 서른 살이 된 정대협은 기존의 활동을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로 물려주고, 역사를 기억・기록하는 기능은 박물관에 남겨두었다. 대다수 사람은 정대협, 정의연, 박물관에서 일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이 역사를 잘 알고, 누구보다 피해자와 가깝고, 어느 기관보다도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나는 이곳에서 일한 지 3년이 되었고, 할머니들과 만나는 날은 생신이나 어버이날, 시위 당일 정도이다. 또한 할머니와 관련된 직접적인 정보는 개인정보로 보호되어 공공기관에서 관리되고 있고, 그간의 연구조사 사업 역시 각각의 연구소와 사업을 발주한 정부 기관에서 관장한다.

글을 쓰면서 가장 고민스러운 점은 내가 과연 한 단체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누군가의 면모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이다. 내부자로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정보 수준을 제공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 글을 기회로 내 기억 속의 단상 아래 내려온 김복동을 부분적으로나마 되짚어보았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딱 두 개다. 보이지 않거나, 항상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있거나. 

할머니가 생활하시던 서울시 마포구 쉼터 지하엔 박물관에서 옮겨다 놓은 이러저러한 자료들이 있었고, 그걸 정리하느라 일주일에도 몇 번씩을 오갔었다. 자료정리를 도와주었던 학생들에겐 할머니들과의 만남이 귀한 시간이 될 거란 생각에 가능하면 오가며 인사드릴 기회를 마련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2층에서 생활하시던 김복동 할머니는 뵐 수가 없었다. 그리고 쉼터에서 일상 행사를 열 땐 활동 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었다. 공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 북적일 땐 언제나 보이지 않는 단상 위에 계신듯한 느낌이랄까?

대다수 피해자 할머니들에겐 외부에 노출되는 단시간의 모습과 그 밖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의 시간이 공존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김복동의 일상의 시간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노령과 병환 중임에도 스스로 공식활동으로 일정을 빼곡히 채우셨고, 늘 단상 위의 시간을 준비하고 계셨다. 살아내는 모든 시간이 오롯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도 사람도 다른 것엔 곁을 잘 내어주지 않으셨는데, 할머니의 온도가 차갑게 느껴졌던 분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이지 않을까. 임종 한 해 전에 진행된 할머니의 인터뷰에 기반한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김숨, 2018)가 쓰이기까지도 수많은 설득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우리 곁에 있었지만, 지금도 그때도 그녀를 만나는 건 단상 위에서이다. 보이지 않을 땐 뭔가 다른 모습이 있을 거란 생각, 혹은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 것이라는 생각, 의심할 필요도 추앙할 필요도 없다. 그저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고 내가 본 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간혹 수십 년을 사귀어온 친구, 가까운 가족 사이에도 저 친구가 저런 면이 있었어? 하며 놀란다. 우린 할머니의 삶을 모두 알지 못한다. 할머니가 증언해온 어린 시절 단편적인 이야기와 67세가 넘어 인권운동가로 성장하기까지의 활동 몇몇을 알 뿐이다. 할머니의 20대는? 30대는? 그리고 40대, 50대는? 

지금 서 있는 곳을 바꾸어야만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달처럼, 우리 세대가 부지런히 자리를 옮겨가며 피해자를 바라보아야만, 그들의 온전한 삶과 역사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쨍하고 해 뜰 날

백시진(정의기억연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2014년 1월 8일 평화로에선 수요시위 22돌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수요시위 버전 <해 뜰 날>이 울려 퍼졌다. 김복동 할머니의 “쥐구멍에도 해 뜰 날이 온다”는 발언에서 착안한 순서였다. 할머니께서 주문처럼 자주 말씀하셨던 이 말은 희망의 표식이면서도 본인의 운동 원칙이었다. 밤이 지나면 동이 트듯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도 언젠가 해 뜰 날이 올 테니 좌절하지 말고 문제 해결만 바라보고 향해 간다는 원칙 말이다. 김복동 할머니의 굳은 의지는 시공간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2015년 7월 김복동 할머니는 미국 시카고 소녀상 건립사업 관련 캠페인 중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활동가 라스미아 오데와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라스미아는 성폭력 및 고문 피해자로 1980년대 국제 사회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한 피해를 증언하였다. 김복동 할머니와 라스미아가 만났을 당시 라스미아는 미국 연방정부의 공격으로 미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그에게 연대의 메시지와 함께 나비기금을 전달하였고 이 일화는 SNS를 통해 알려졌다. 어찌 보면 짧은 만남이었겠지만 적어도 나의 활동 방향을 설정하는데 큰 지표가 되었다.

나는 올해 2월 팔레스타인에 다녀왔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연대하기 위해 그리고 김복동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였다. 나는 현지 활동가들에게 김복동 할머니와 라스미아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도 전시 여성폭력 피해자들에게도 제국주의·식민주의·군국주의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해 뜰 날이 올 테니 희망을 잡고 살아가자는 김복동 할머니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은 김복동의 연대에 감사를 표하면서 팔레스타인에서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실제 다양한 강연회를 기획하고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중 지역 청년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많이 알려야겠다며 대학 강연을 계획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강연 행사는 코로나19로 취소되었지만, 여전히 그곳에는 할머니의 메시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실 내게 김복동 할머니는 약간 어려운 사람이었다. 항상 같은 표정을 짓고 계셨고 곁을 잘 내어주지 않는 분이었다. 그런 김복동 할머니가 내 마음에 이렇게 크게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김복동이 남긴 희망과 의지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 몇 달간 다양한 일들을 겪으면서 나도 할머니의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 해 뜰 날은 돌아온다고. 지금이 어떤 상황이어도. 아무리 막막하더라도.
 


미국에서 만난 김복동

김현정 (배상과교육을위한위안부행동 대표)


2012년은 미국 연방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 일명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지 5주년 되는 해였다. 당시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시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기초작업을 다지고 있던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CARE, 당시 가주한미포럼)’은 글렌데일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시회, ‘위안부의 날’ 선포식, 캘리포니아주립대(칼스테이트 LA)강연회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하원 결의안 121(HR 121)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러 미국에 오신 김복동 할머니와 윤미향 대표를 로스앤젤레스에서 맞게 되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이미 만 86세의 고령임에도 자세는 꼿꼿하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며 쉬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담배 한 개비의 여유를 즐기면서 거침없는 화법으로 일본과 아베를 향해서는 직격탄을 날리는 분이셨다. 우리 활동가들을 향해서는 걸쭉한 농담을 건네시는 멋진 활동가이셨다. 당시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할머니 일행을 챙기느라 바쁘게 뛰던 나를 며칠 관찰하시던 할머니가 “솔밭이 다 닳겠네” 하시는 바람에 다 같이 어찌나 웃었는지.

대중강연을 하실 때는 늘, “나이는 87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입니다”로 시작하셔서 당신이 겪으신 고초와 끌려다니신 수많은 국가, 장소들을 일일이 또렷하게 열거하셨다. 관중들은 그 고통의 깊이에 깊은 한숨을 쉬었고, 카랑카랑 또렷하게 증언하시는 할머니의 총기에 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미국의 주요 TV 방송국인 Fox News에서 카메라맨을 보내 뉴욕의 기자와 전화 인터뷰를 하실 때는 할머니의 말씀에 감동한 기자가 눈물을 흘렸고, 이는 일본 정부의 역사 부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뉴스 보도로 이어져 화제를 모았다.

이후 한국을 찾아 수요시위에서 인사를 드렸을 때는 이미 할머니의 눈이 많이 나빠지신 상태셨다. 멀리서나마 건강을 기원했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1월 세상을 떠나셔서 미국에서도 로스앤젤레스 시의회, 샌프란시스코 시의회 등에서 추모의 시간을 가지고 글렌데일 소녀상과 샌프란시스코 동상 앞에서 추모제를 지냈다. 할머니의 활동가 정신은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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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웹진 <결>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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