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웹진 <결> 편집팀

  • 게시일2019.09.05
  • 최종수정일2019.09.05

[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방향 1부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현재 한일 외교 관계는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하여, 최근 한국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지소미아, GSOMIA)을 종료하기로 결정하였다. 외교 갈등 국면이 이어지는 한편,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인정과 배상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한일 간의 외교 문제는 비단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숙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안부’ 문제 진실 규명을 위한 한일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어지기 위해 어떤 움직임을 보여야 할까.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은 이러한 고민을 담아 지난 2019년 6월 5일 좌담회를 진행했다. 본 좌담회는 지금의 한일 외교 갈등이 일어나기 전 시점에 이루어진 것으로 최근의 이슈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쟁점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부 :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 ‘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꾸다
2부 :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법적 구속력은 어디까지인가
3부 : 진실 규명을 위한 양국간의 책임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좌담회 일자 : 2019년 6월 5일 
사회 :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패널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 조양현 (외교안보연구소)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본 좌담회에 참여한 패널의 입장은 각 소속 기관과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의 공식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간의 외교적 현안과 국제적 맥락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익숙한 이슈죠. 하지만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외교적 현안과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은 따라가기가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뉴스에서도 자주 다루어지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용어가 많고 워낙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사건과 맥락을 웹진 <결> 독자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기정

90년대 초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 문제와 관련된 한일간의 외교적인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은 일본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은 일본 쪽에 맡긴다는 것이었어요. 일본 내에서 자발적인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 정부도 이를 수용해서 외무성에서 직원들을 파견하여 ‘위안부’ 문제를 조사했어요.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일정한 대응을 하는 것이 맞다고 인식을 했고, 그 입장을 정리한 결과가 1993년의 고노담화입니다.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입장을 정리한 것이었죠.

이어서 일본 정부는 민간기금의 형식으로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듭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입장은 ‘법적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것이고, 이는 도의적인 책임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는 것이었어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해결 노력이라기보다는 일본 국민의 성의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내에서는 일본이 제대로 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죠. 

그래서 한국 내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련해 일본 정부에 제대로 된 해결과 법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양상이 결정적으로 변하게 된 사건은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이었습니다. 대법원의 결정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간의 외교 현안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일본에 한일 청구권협정 3조에 따른 협의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 한국 내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외교 문제로 풀어야 한다는 요구가 줄곧 제기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한일 외교에 대해 소위 말하는 원 트랙 방식*을 취하고 있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외교에 걸림돌이 되는, 치워야 하는 현안이었죠. 그 결과 우리로서는 굉장히 미흡한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이하 12.28 합의)가 나오게 된 거죠.

*편집자 주 
원 트랙 방식 :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를 하나의 외교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방식
투 트랙 방식 : 과거사 문제와 한일 관계 정상화를 다른 사안으로 분리하여 대응하는 방식 



Q.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결정과 2015년의 12.28 합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외교 현안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본격적으로 나누어보도록 하고요. 외교적, 법적 문제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정부의 방침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외교적 현안을 이해할 때 어떤 맥락으로 이해하면 좋을 지 포인트를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조양현 

12.28 합의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포인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각 정권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영삼 정부 이후 대체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강했어요. 물론, 이명박 정부와 같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보다는 한일 신뢰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방침도 있기는 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제기된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역사문제에 있어서 (고노담화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세를 취했는데요, 2006년 아베 정부가 들어오면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 부인 등 고노담화를 재검증하려고 하는 듯한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어요. 역사수정주의 담론이 나오기 시작한거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약 30년 가까이 되다 보니까 (한일 양국의) 정권, 그리고 그 정권을 담당하는 최고 지도자의 개인의 이념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대법원의 결정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한민국의 방침을 실질적으로 변경시킨 효과가 있었어요. 이 결정이 나오기 전, 이명박 정부 초기에는 일본과 실리위주의 관계를 우선으로 하고 과거사에 관한 것은 외교부의 아젠다로 삼지 않겠다고 표명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 부작위위헌 결정이 나오니까 입장을 바꿉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일본과의 공식 외교 아젠다로 제기합니다. 

2011년 12월 교토회담이 이렇게 이루어지죠. 약 1시간 정도의 회담 내용 중 약 80%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의였다고 합니다.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민간공동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며,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냈지만, 일본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자칫 이 문제가 묻히기 쉬운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이 이러한 흐름을 역전시키는 모멘텀이 되었던 것이죠.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사법판단이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세 번째 포인트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각의 변화입니다. 초기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자 간의 문제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일본이 식민지배라는 불법적인 행위를 했고, 거기에 대해서 한국은 배상·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과거 일본의 식민침략과 관련된 진실 규명을 해야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2000년대 들어가면서 (이미 국제 사회에서는 냉전 이후 90년대 중반부터 활성화됩니다만,) 전시 여성 성범죄 문제의 일환으로써 다루어져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과거사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닌 현재 살아있는 이슈가 되는거죠. 국제 사회에서의 여성 인권의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시현

2004년에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가 특별법에 따라 활동을 개시했다는 점도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근, 작년이죠. 2018년 10월 30일, 한국대법원에서 (일본정부와 기업의) 강제동원으로 정신적인 피해를 받은 피해자들의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서 일본 가해 기업들에게 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했습니다. 강제동원피해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일본군‘위안부’ 문제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의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이러한 측면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풀어가는 방향을 점검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아시다시피 1991년 김학순 피해자의 증언 직후 당시 UN인권위원회의 인권소위원회에서 이 문제가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로 다뤄지면서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이 가입한 각종 인권 조약 하에서 한국과 일본의 인권 상황을 심의하는 절차들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자유권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인종차별철폐위원회, 고문방지위원회 등 UN차원에서 일본정부의 책임이행을 촉구하는 권고들이 지속적, 주기적으로 채택이 되어왔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2015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합의 자체에 대해서도 UN의 각종 인권 보장 기구들이 이런저런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뚜렷한 국제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세계적으로 소녀상 설립운동이 펼치기도 했고요. 이런 국제적인 흐름들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죠.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위헌 결정의 배경과 쟁점 


Q. 2011년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결정은 국민이 가장 의미있다고 뽑은 헌재 결정이기도 하죠. 조양현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어떤 맥락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조시현

2000년에 여성국제전범법정이라는 민간법정에서 ‘위안부’에 대한 가해는 국제법상 범죄이고 일본의 국가책임이 성립한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민간법정이었기 때문에 일본정부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죠. 한국에서는 국회 법률에 따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보상하는 생활안정지원법이 있었지만, 이는 (일본이 아닌) 한국정부의 대응이고, 더군다나 일시금을 지급했지만 인도적인 지원금일뿐 제대로 된 보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강제동원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들이 있긴 했지만, 일본정부의 책임을 추궁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국가 대 국가 차원의 외교현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시민사회 측에서 나오게 됩니다. ‘국가는 외교적으로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는데,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부작위이다, 국민을 위해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해야한다’는 운동단체의 요구가 있었던 겁니다.

재판이 굉장히 오래 걸렸죠. 판결이 5년만에 나왔는데, 다행히 훌륭한 결정이었습니다. 한일 양국이 청구권협정을 놓고 다투고 있으니까, 한국정부는 그러한 분쟁을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현재는 그러지 않고 있다고 질책하는 결정이 나온 거죠.

이명박 정부도 이를 받아들이고 바로 일본정부에 협의요청을 합니다. 2011년 8월 30일 헌재 결정이 났고 9월 15일 일본정부에 대해 협의요청을 했으니까 보름만에 행동을 취한 거죠. 어쨌든 아베 1차 내각의 설립 이후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 등 부정적인 움직임 속에서 헌법 소원이 좋은 결과를 맺었습니다. 헌법 재판의 결과는 2012년 한국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 즉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에 배상책임을 묻는 첫 번째 대법원 판결에서도 그 논리가 그대로 인정이 되었다고 보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불법적인 강점이고 그것을 전제로 한 강제동원은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이다. 따라서 거기에 대해서 일본기업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었지요.

헌법재판소는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협정 바깥에 있는 문제라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가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논리, 즉 한국정부가 문제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와 외교적 보호권이 살아있다는 논리가 사실은 같은 이야기에요.
 

남기정

2005년도 한국대법원의 입장은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대응을 요구했던 것으로 기억하거든요. 굉장히 복잡한 문제지만, 청구권협정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를 이제까지 한국정부가 손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라는 걸로 저는 이해를 했었어요. 청구권협정에 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고요. 청구권협정의 바깥에 있는 문제들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한국정부의 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을 여기서 처음 내렸다고 하는 것이죠. 1965년도에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던 외교적 보호권도 있지만, 우리가 발휘하지 않은 외교적 보호권도 있다는거죠. 그것을 이행하라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조시현

외교적 보호권이 요구하는 것과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궁극적으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법상 외교적 보호권은 자국민이 해외에서 권리침해를 당했을 때 국가가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무를 뜻합니다. 외교적 보호권의 대상이 되는 사항들은 대게 해외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주권이 문제가 되고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지만,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서는 본국이 개입해서 권리구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는 것이죠.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협의 요청, 즉 대화입니다. 외교적 교섭이 있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재와 같은 국제재판을 통해서 해결안이 모색될 수도 있고요. 다양한 형태의 외교적 노력을 지칭하는 용어가 외교적 보호권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물론 정부가 아무것도 안해온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헌법재판소는 정부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문을 한거죠.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서는 주요 결정 25선을 만화로 쉽게 표현하여 설명하고 있다. 25선 중에는 정부의 '위안부' 피해 외교적 방치 위헌 결정도 포함되어 있다. 
https://www.ccourt.go.kr/cckhome/kor/ccourt/maindecision/maindecision.do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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