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을 추억하다 4 - 학순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노부카와 미츠코 (信川美津子)시민운동가

  • 게시일2019.08.13
  • 최종수정일2019.09.05

 

학순 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1991년 8월 14일, 한국의 김학순 씨가“나는 일본군의‘위안부’였다”고 증언했다. 나는 그 신문 기사를 보고“아, 역시” 하고 탄식했다. 약 이십 년 전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이었던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 전쟁은 인간을 악마로 만들어버린다. 전장에서 여자나 아이들을 발견하면 강간하거나 윤간하고, 필요 없어지면 연못이나 하천에 내버린다. 나는 그러지 않았지만 말이다.”

김학순 씨의 증언이 있고 아직 3년이 채 못 되었던 1994년 5월 4일, 일본의 나가노 시케토 법무대신이 태평양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고 ‘위안부’는 공창이었다는, 고노 담화를 뒤엎는 발언을 했다.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5명과 그 가족들이 일본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 나는 일본을 찾은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그때부터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김학순 씨가 1994년 10월 초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증언 집회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일본인은 입을 두 개 가지고 있다. 한 입으로 사죄하면서도 다른 입으로는 ‘위안부는 돈을 벌러 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상한 나라다”
 “일본이 경제 대국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와보니 아무래도 다들 그렇게 풍족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원내 집회 당시, 의원회관 앞에 버티고 앉은 작은 몸집의 김학순 씨는 의연했고, 그 모습에서는 고상함마저 느껴졌다. 그 후로도 나는 학순 씨에게 국제전화로 안부를 묻거나 근황을 알려 드리기도 했다.

1997년 1월 11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7명의 피해자에게 비공개로 국민기금이 지급됐다. 국민기금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찬반이 분분했고, 나는 그 정도 결과밖에 내놓을 수 없었던 시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후 이용수 씨가 "김학순 씨가 화가 났으니 만나러 오라"고 전화를 여러 번 하셨다. 나는 3월쯤 김복선 씨와 이용수 씨와 함께 병문안을 위해 김학순 씨 댁을 방문했다. 그러자 학순 씨는 첫 마디부터 "왜 양측이 납득할 만한 결과를 내지 못했느냐"고 혼을 내셨다. 나는 "정말 그렇네요. 죄송합니다"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학순 씨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보세요. 문옥주가 죽고, 강덕경이 죽고, 다음은 나일 겁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런 말씀 마세요. 100살, 200살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라고 답했다.

나는 카스텔라, 네슬레의 골드 블렌드, 매실장아찌를 선물로 들고 갔다. 학순 씨는“나는 커피는 안 마시지만, 매실장아찌는 좋아해”하고 말했다. 나를 포함해 학순 씨, 김복선 씨, 이용수 씨 등 총 다섯 명이 학순 씨 댁에서 떠들썩하게 저녁 식사를 요리해 먹었다. 학순 씨와 복선 씨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같이 등걸잠을 잤고, 다음날 학순 씨의 배웅을 받으며 김복선 씨와 이용수 씨와 나는 돌아왔다.

이후 6월에 한국에 갔을 때, 학순 씨가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김복선 씨와 함께 병문안을 하러 갔다. 학순 씨가 매실장아찌를 좋아한다고 해서 가다랑어포 맛, 차조기 맛 등의 매실장아찌를 가져갔다. 학순 씨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내가 "그걸 하고 있으면 편하세요?"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간 매실장아찌를 몇 개나 드셨을까…….  8월에 한국에 갔을 때 김복선 씨와 다시 한번 병문안을 하러 갔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교회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입원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병세가 별로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었지만, 한국에 가 보지는 못했다. 

김학순 여성인권운동가의 장례식 (제공 : 나눔의 집)

김학순 여성인권운동가의 장례식 (제공 : 나눔의 집)



그리고 12월 16일, 학순 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항공권을 구해 한국으로 갔다. 당일에는 김복선 씨 집으로 갔고, 다음날 김복선 씨, 문필기, 김윤심, 김은례 할머니와 함께 장례식장인 아산병원으로 갔다. 이미 와 계신 할머니들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작게 웅크려서 울고 계셨다. 할머니들께 학순 씨는 의지할 수 있는 리더, 언니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할머니들께서 낙담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다.

다음 날 아침, 장례식이 끝나고 학순 씨를 태운 버스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던 수요집회에 들러 화장장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학순 씨가 사용하던 수첩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일본에서 노부카와가 왔다’고 쓰여 있었지만 나는 그날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헷갈리셨나? 내가 오기를 기다리셨던 걸까’하고 생각했다.

뼈가 되어버린 학순 씨를 태운 버스는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으로 향했다. 학순 씨는 생전에 미리 마련해 놓은 묘지에 묻혔다. 사람들은 각자의 추억을 담아 삽으로 흙을 뿌렸다. 저녁을 먹고 다시 서울로 버스가 향할 즈음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나와 이용수 씨는 약간 번화한 거리에 내려서 저렴한 숙소를 찾아 함께 묵었다. 학순 씨와 작별한 기나긴 3일이었다.

그 후, 도쿄에서도 추모회가 열려 김순덕 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학순 씨의 용기와 다정함을 그리워했다. 1년 뒤에도 망향의 동산에서 1주기 행사가 열려 일본에서 온 참석자들도 학순 씨를 회상했다.
 

학순 씨!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가요?
많은 자매와 함께 있어 시끌벅적하겠지요.
옆에는 황금주 씨도 계시고,
친하게 지내셨던 김복선 씨도 계시고,
강순애 씨가 계시고,
배족간 씨도 계시고,
박복순 씨도 계셔서…
외롭지 않으실 거예요.

저도 다시 만나게 되겠죠.  
그날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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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노부카와 미츠코 (信川美津子)

시민운동가. 1994년, 소송을 위해 일본을 찾은 ‘위안부’ 피해자 15명과 유족들에게 숙소를 제공했다. 당시 가와사키의 아사다 교회와 여성센터가 숙소를 제공했고, 평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던 노부카와도 본인 집으로 할머니들을 모셨다. 며칠만 도움을 드리자고 생각했던 노부카와는 결국, 할머니들과 함께 집회장과 총리 관저 앞에 나갔고, ‘위안부’ 문제를 온몸으로 배웠다. 노부카와는 1995년 뜻을 같이하는 친구 30여 명과 함께 ‘할머니들과 함께 걷는 모임-조각보’를 결성하고, 1998년 모임이 해체될 때까지 수십여 차례에 걸쳐 일본 대도시의 학교 등에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집회를 열었다. 이후 ‘위안부문제해결 올(all) 연대 네트워크’ 활동 및 개인활동을 이어가며 매년 적어도 두 번 이상 한국을 찾아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