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과 젠더 폭력은 TRC의 미완수 과업: 젠더 정의를 향해 계속되는 남아공의 여정 (2)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 게시일2023.12.18
  • 최종수정일2023.12.18

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은 목소리들(Voices No Longer Personal)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혼자다(Until we find each other, we are alone).” -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 

여성 연대(solidarity)의 가치를 되새기며, 2023년 웹진 결은 세계 여성 폭력의 현주소를 성찰하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와 인종 차별의 잔재가 높은 여성살해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정폭력을 피해 거리로 내몰린 가출 청소년들이 성착취와 성매매 산업의 먹잇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시아 칵번(Cynthia Cockburn)이 제시한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사회적 구조와 규범이 전시와 평상시를 관통하는 성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연속체론(continuum theory)을 상기시킵니다. “전쟁? 나에게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라. 나의 일상이 이미 충분히 전장과도 같다(War? Don’t speak to me of war. My daily life is battlefield enough).”고 말하며 오늘도 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교수와 사야카 채터니(Sayaka Chatani) 교수의 글로 만나보시죠.  

 

일시적 행동주의

2018년의 ‘다음은 내 차례인가(#Am I Next)’ 운동 ⓒLorie Shaull, Wikimedia Commons

 

2019년 8월, 19세의 케이프타운대학교 학생 우이네네 므뤠티아나(Uyinene Mrwetyana)가 케이프타운에서 우체국 직원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 영화미디어학과 1학년 학생이었던 우이네네(신, 진리를 의미)는 우체국에 소포를 찾으러 갔다가 잔혹하게 공격당하고 살해당했다. 코파노 라텔레(Kopano Ratele)는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끔찍한 공격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이 나라에서 우이네네의 살해 사건은 소수의 사건들만 가능했던 방식으로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라고 언급했다. 수천 명의 여성이 거리로 나섰고 ‘#다음은 내 차례인가(#Am I Next)’ 캠페인이 시작됐다. 그러나 〈뉴요커(New Yorker)〉에서 지적했듯, 우이네네의 사건은 다음과 같은 주지의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켰을 뿐이다. “특히나 충격적인 이야기가 신문 1면을 장식하고 나라 전체에 또 다른 (피해) 여성의 이름이 알려진다. 때로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때로는 누구의 이름을 왜 기리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략) 집회가 열리고 국가 애도의 날이 선포된다.” 그런 뒤에는 또 다른 여성이 강간과 살해를 당했다는 또 다른 충격적인 이야기가 헤드라인에 오른다.

우이네네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는 2018년 ‘#완전한 중단(#TotalShutDown)’ 운동이 일어난 지 거의 1년 만의 일이었다. 2018년 당시 수천 명의 여성과 성소수자, 젠더다이내믹스(Gender DynamiX), 사르트지에바트만여성아동센터(Saartjie Baartman Centre for Women and Children)와 같은 단체가 대규모 행동을 전개했다. 시위대는 2017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후 불에 태워진 카라보 모코에나(Karabo Mokoena)와 2018년 5월 살해된 21세의 대학생 졸릴레 쿠말로(Zolile Khumalo)를 비롯한 여성 살해 피해자들을 추모하며 행진했다. 운동은 “폭력은 그만, 캠페인도 그만, 립서비스도 그만!(Enough Violence, Enough Campaigning, Enough Lip-service!)”이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되었고, 시위대는 정부에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한 강도 높은 조치를 요구했다. 

2018년 #완전한 중단(#TotalShutDown) 운동 ⓒEunice Namugwe, UN Women South Africa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행진은 24가지 요구 사항을 의회에 전달하는 것으로 성료됐다. #완전한중단국가위원회(#TotalShutDown National Committee)의 가오팔렐웨 팔라에칠레(Gaopalelwe Phalaetsile)는 “양해각서에 명시된 24가지 요구 사항은 여성과 성소수자가 홀대되었던 지난 24년간의 민주주의를 상징한다”라고 밝혔다. 시위를 8월에 시작한 것은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남아공에서 8월은 1956년 약 2만 명의 여성이 아프리카 여성 통행권 도입에 반대하는 역사적인 행진을 개최한 ‘여성의 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여성들은 “여자에 대항하는 건 바위에 대항하는 것, 바위에 대항하면 깨지고 말리라!(When you strike the women, you strike a rock, you will be crushed!)”라는 구호를 외쳤고, 이후 해당 구호는 남아공에서 억압에 맞서는 여성의 용기와 힘을 상징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남아공에서는 다수의 여성 권리 옹호 운동이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운동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여성전국연합(Women's National Coalition)은 1991년 70개 이상 단체의 연합을 통해 평화 협정 협상에 여성의 입장이 포용되고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단체들의 목표는 계급, 인종, 이념의 측면에서 확연히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효과적인 평등을 위한 여성 헌장(Women’s Charter for Effective Equality)’을 마련함으로써 궁극적으로 1996년 제정된 성 감수성 헌법에 영향을 미쳤다. 남아공의 체제 전환 이후에도 행동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 왔으며, 손케젠더정의(Sonke Gender Justice) 및 여성학대에반대하는사람들(People Opposing Women Abuse; POWA)과 같은 다양한 비정부기구가 설립되었다. 최근에는 #남자는쓰레기다(#MenAreTrash), #완전한중단, #우먼포체인지(WomenForChange), #강간문화종식(#EndRapeCulture) 등 수많은 소셜 미디어 캠페인이 젠더 기반 폭력 관련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발적인 이슈 중심 행동’은 정부가 조치를 취하도록 지속적인 압력을 가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더 문제적인 사실은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과 비슷한 맥락에서, 폭력의 가해자나 조력자가 아닌 폭력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에게서 행동주의와 변화를 위한 노력이 기대된다는 점이다.

남아공의 이행기 정의 운동

이행기 정의의 실천과 이론의 발전은 여러 면에서 남아공의 경험에 영향을 받았다. 폭력의 역사를 직시하고 보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대안적 조치에 남아공이 기울인 노력은 당시 세계에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승자의 정의’를 지양한 남아공의 국가 건설 과정을 이끈 것은 1995년 〈민주적 남아프리카를 위한 협약(Convention for a Democratic South Africa; CODESA)〉 합의를 기반으로 수립된 TRC였다. TRC 설립의 근거가 된 법은 동 위원회의 목표를 “과거의 갈등과 분열을 초월하는 이해의 정신으로 국민 통합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원회의 쉴라 마인체스(Sheila Meintjes)와 베스 골드블랫(Beth Goldblatt)은 위원회가 젠더 기반 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남아공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이해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1996년 남아공 ⓒEncyclopædia Britannica

 

어떤 면에서는 남아공 TRC가 여성을 성공적으로 포용한 듯했다. 위원회 구성원의 절반 이상을 여성이 차지했고, 여성 문제만을 다루는 별도의 청문회가 세 차례나 열렸다. 그러나 많은 젠더 활동가들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보다는 타인의 경험에 대해 진술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21,000건의 진술 중 446건은 성적 학대로 분류되었고 강간은 140건에서만 명시적으로 언급됨)과 특히 아파르트헤이트가 여성의 삶에 미친 구조적 영향이 간과되었다는 점을 들어 TRC를 비판했다. 또한 TRC는 강간을 현재 국제법에서 인정되는 고문과 박해의 한 형태로 인정하지 않고 중대한 가혹 행위(severe ill-treatment)로 분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최종 TRC 보고서에서 여성 문제가 한 장(chapter)에 걸쳐 다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남아공의 젠더적 특성은 피상적으로만 기록되었다.

당시 응용법률연구센터(Centre for Applied Legal Studies)가 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조사를 요하는 성폭행과 고문의 광범위한 증거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폭력 역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안드레아 두르바흐(Andrea Durbach)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향후 이행을 위한 지도를 그려나가는 주요 과정에 여성 성폭력 같은 문제에 대한 인식과 구제를 다루는 중요한 지점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개발, 변화, 배상이 피해를 입은 개인의 존엄성 회복에 영향을 미치거나 폭력 경감과 예방에 기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물론 남아공 TRC는 심각한 인권 침해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성과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의 구조적 영향을 조사하지 않음으로써 이후 남아공에서 계속되고 있는 폭력, 특히 젠더 기반 폭력을 어떤 식으로든 용인하게 된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쉴라 마인체스를 비롯한 이들이 강조하듯, 남아공은 “과거에 여성에 대해 자행된 정치적 폭력이 현재의 폭력 수준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사회이다. 두르바흐는 또한 유사한 맥락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고질적인 폭력과 그에 수반된 불처벌은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도 여전히 높은 여성 성폭력을 설명하는 반복적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쿨루마니 갈렐라 캠페인(Khulumani Galela Campaign)에 따르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과 젠더 폭력은 아직 완수되지 않은 과업의 일부이고 우리는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결론

그렇다면 남아공은 과연 언제까지 세계에서 여성이 살기에 가장 위험한 나라 중 하나에 머무를까? 구조적 불평등과 젠더 기반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적 규범에 맞서지 않는 한 여성 권리 신장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이니셔티브는 실패를 거듭할 것이 분명하다. 아만다 가우스(Amanda Gouws)를 비롯한 옵저버들은 보다 적극적인 여성 운동과 헌신적인 “국가 조직 내 페미니스트 여성”이 필요함을 촉구한다. 1990년대 민주주의 이행기에 여성 평등에 앞장섰던 여성전국연합의 사례는 흔히 모범 사례로 언급된다. 그러나 민주주의 이행기에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여성들을 결집시켰던 단체의 강점이 결국은 약점으로 작용했다. 1994년 4월 선거 직후 일반인 여성 모임은 와해되었다. 피나 코디상(Phinah Kodisang)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향후 동원 대상이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포괄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코디상은 〈젠더 기반 폭력 및 여성 살해에 대한 국가 전략 계획(NSP-GBVF)〉과 관련해 “모든 남아공 국민에게는 현 상황과 같은 폭력과 강간을 없애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강간과 여성 살해를 종식시키려는 집단적 의지는 물론 구조적,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1997년 당시 남아공 TRC를 향한 덴지웨 음틴소(Thenjiwe Mtintso)의 메시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젠더 불평등과 젠더 불공정은 인권 침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아공 사회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여 결집하였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결집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정계 진출을 바라며 ⓒ백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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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헬렌 스캔런(Helen Scanlon)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교(UCT)의 정의와 변화 프로그램(ustice and Transformation Programme) 의장. 이행기 정의 관련 실무자이자 학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행기 정의, 젠더, 평화 구축에 관한 광범위한 저서를 출간했다. 최근 저서로 젤케 보에스텐(Jelke Boesten)과 공저한 『Gender, Transitional Justice and Memorial Arts: Global Perspectives on Commemoration and Mobilization (젠더, 이행기 정의, 기림 예술: 기림과 동원에 관한 세계적 관점)』(런던: Routledge, 202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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