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인터뷰

에카 힌드라티 (Eka Hindrati)

  • 게시일2020.03.24
  • 최종수정일2022.11.25

인도네시아는 한국과 함께 과거 일본의 침략를 경험했던 나라다. 그렇기에 인도네시아에서도 일본군‘위안부’라는 슬픈 역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내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한 조사와 지원은 한국만큼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에카 힌드라티(Eka Hindrati)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연구자다.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녀에게 인도네시아 내 일본군‘위안부’ 연구와 조사의 진행 상황, 그리고 공통의 역사로 연대하기 위해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를 물어보았다.

 

비니, 마르디엠, 에스티, 에카 힌드라티, 노브, 2006 ©에카 힌드라티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자
에카 힌드라티

Q.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결>의 독자를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에카 힌드라티(Eka Hindrati)입니다.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독립적으로 조사하는 사람이에요. 1992년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대외적으로 처음 밝힌 일본의 고이치 기무라(Koichi Kimura) 박사와 협력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Q. 선생님과 고이치 기무라 박사님께서 함께 쓴 책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는 일전에 웹진<결>에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활동 혹은 연구를 하게 되신 계기가 따로 있었을까요?  

제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계기는 1999년 자카르타의 <Internews> 라디오 기자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당시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요, ‘위안부’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에서 고이치 기무라 박사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욕야카르타(Yogyakarta) 법률구조단의 부디 산토소(Budi Santoso) 씨를 만났어요. 그때 처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알게 되었죠. 저는 ‘위안부’ 피해자인  마르디엠(Mardiyem)에 대한 취재 기사를 작성했는데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상징적인 인물이었어요. 그녀가 바로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의 주인공입니다. 당시에 썼던 취재 기사는 인도네시아 전역 50개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지요. 


Q. 에카 힌드라티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만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한국의 웹진 <결> 독자를 위해 당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가 어떠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인도네시아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있는 곳이라면 위안소가 개설되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는 인도네시아 서쪽 끝에 위치한 아체(Aceh)에서부터 동쪽 끝인 파푸아(Papua)까지 널리 분포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국토 중 동부 지역에 산재해 있었던 위안소에는 특히 한국과 타이완에서 온 여성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요.

인도네시아 출신 ‘위안부’는 등급별로 구분되어 배치되었는데, 흰 피부를 가진 인도네시아 북부 술라웨시(Sulawesi) 머나도(Manado)출신의 인도네시아 여성과 중국계 여성, 그리고 네덜란드계 여성들은 일본군 장교들 몫이었습니다. 반면에 갈색 피부를 갖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Java) 출신 여성들은 계급이 낮은 일본군들에게 할당되었지요. ‘위안부’들 나이는 16세에서 25세 정도였고, 그중에는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은 어린 여성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사진 ©에카 힌드라티

 

인도네시아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지기까지

Q. 그렇다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게 된 시기는 언제였나요? 

인도네시아에서는 1992년에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알려졌습니다. 신문기자인 조코 산토소(Joko Santoso)가 일본군‘위안부’로 감금되었던 숙모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언급했어요. 그의 숙모였던 투미나(Tuminah)는 중부 자바, 솔로(Solo) 지역에 후지 여관(Fuji Ryokan)이라고 이름 붙여진 위안소에서 3년 6개월 동안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 생활을 했다고 해요.  조코 산토소는 본인이 속한 수아라 머르데카(Suara Merdeka) 신문에서 1992년 7월 16일, 7월 21일 두 차례에 걸쳐 숙모의 ‘위안부’ 사연을 기사화했죠. 

기사를 본 고이치 기무라 박사와 그의 부인인 평화 운동가 옥초 기무라(Okcho Kimura) 씨가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직접 만나면서 처음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조사 결과는 일본의 다양한 매체에 소개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되었죠. 

1993년 일본 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Nichibenren) 소속 5명의 변호사가 자카르타 법률구조단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로 착취당한 희생자들을 위한 손해배상 문제가 제기되었죠. 일본 변호사들의 방문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생존해 있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들을 끝까지 파악하겠다는 당시 인도네시아 사회부 장관인 인텐 수웨노(Inten Suweno)의 성명으로 이어졌습니다. 


Q. 처음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밝혀졌을 때 사회적 반응은 어떠했나요?

당시 사회부 장관이었던 인텐 수웨노의 성명은 1993년 4월 20일, 머르데카(Merdeka) 일간지에 게재되었고, 성명에 따라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 여성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어요. 1945년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이래로 반인륜적인 ‘위안부’ 문제가 한 번도 공론화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과 충격을 가져다주었죠. 사회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비정부기구인 자카르타 법률자문단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과 노무동원 피해자들의 등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본 등록 업무는 욕야카르타 법률구조단으로 이관되었고요.


Q. 등록을 받은 결과는 어땠습니까? 

1993년 4월 29일부터 1993년 9월 14일까지 등록을 받은 결과, ‘위안부’ 피해자 1,156명과 노무동원 피해자 17,245명의 인적 사항이 확인되었어요. 그리고 1995년 아시아 지역 보상을 위한 아시아-태평양전쟁 희생자연합 국제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 of Asia Pasific War Victims Organizations Claiming for Asia Compensation)에 인도네시아가 가입한 후, 1996년 일본군 보조병인 헤이호(Heiho‧兵補) 출신 연합이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받았는데 그 목적은 일본군 침공에 따른 아시아-태평양 지역 희생자 개인별 보상 약정(Agreement Individual Compensation for Asia Pacific Victims of Japanese Aggression)에 따른 인도네시아 희생자들의 보상 추진이었습니다. 1996년 3월 30일에 마감을 통해 ‘위안부’ 피해 여성 19,573명이 등록하였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공개적으로 밝혀짐에 따라 인도네시아 정부도 공식적인 대응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일본군 성노예로 전락한 사실에 대해 경악과 충격, 부끄러움을 표했지만, 일본 정부와의 조화로운 협력 관계를 우선시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노력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위안부’에 대한 학교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부끄러운 상황입니다. 


Q.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의 상황은 어떤가요? 

앞서 말씀드린 일본 변호사연합회(Nichibenren) 인권위원회의 자카르타 법률구조단 방문 이후, 법률구조단은 ‘위안부’ 현황 조사와 등록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시기에 법률구조단은 인도네시아부인회(회장: 누르샤바니 캇자숭카나(Nursyahbani Katjasungkana)와 반 여성적 무력 반대 포럼(Forum Resistance Military Against Women. 의장: 고이치 기무라 박사)과 연계해,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대신한 제소를 준비했고 많은 변호사가 재판에 참석했습니다. 본 연계 활동은 결속력 있게 인도네시아에서 ‘위안부’ 관련 캠페인을 진행하였고 이를 통해 국민 여론에 영향을 주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끝난 후 인도네시아 ‘위안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식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006년에 법률구조단의 몇몇 분과 저, 그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카르타에서 ‘위안부’ 연대(JAJI)를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중부 자바 지역 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하라고 촉구하는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활동을 하다가 본 연대는 와해되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 저와 고이치 기무라 박사가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를 결성하게 됩니다. 본 연대의 조직은 유연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과 지원을 원하는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어요.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공통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Q.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관장하는 특별기구나 단체가 없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이하 JSII)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인도네시아의 사회적 문제로 이슈화하기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책 출간, 사진전, 회화 전시회, 영화 상영뿐 아니라 여론 형성을 위한 기자 초청 간담회 등을 개최하고 있어요.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JSII는 지금도 계속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Q. 에카 힌드라티 선생님께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의 유품을 다수 보유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유품들을 갖고 계시는지요? 

인도네시아 여러 지역에 찾아가 조사를 하면서 일본 점령기 때 만들어진 유물이나 만행의 장소들을 직접 볼 수 있었어요. 생각하지 못한 인도네시아 ‘위안부’ 관련 물품들을 접할 기회도 있었고요. 예를 들면 일본군 술병, 도자기 잔, 탄피, ‘위안부’들이 입었던 인도네시아 전통 복장, 치마, 신발 가방, 모자, 의료 기구 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에 남아 있는 물품은 ‘위안부’용 의료기구예요. 이 의료기구를 처음 본 것은 지난 2002년도예요. 중부 자바, 암바라와(Ambarawa)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헤이호 출신인 사르무지(Sarmudji) 씨가 저와 고이치 기무라 박사에게 보여준 사진에서 처음 보았죠. 그 사진에는 1992년에 찍은 손잡이가 달린 철제 의료기구, 유리로 만들어진 주사액 3병, 2개의 낡은 붕대가 찍혀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위안부’용 의료기구는 수라바야(Surabaya)에 있었던 위안소에서 헤이호 출신 친구가 가져온 것을 사르무지 씨가 인수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사르무지 씨가 당시 집을 수리하느라 이 의료기구가 집 안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찾지를 못했어요. 사르무지 씨가 밝히기를 어떤 일본인이 찾아와 본 의료기구들의 인수를 간절히 원했다고 했어요. 2004년에 저는 사르무지 씨를 다시 만났고 그제야 일부 파손된 ‘위안부’용 의료기구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르무지 씨는 기꺼이 이 역사적인 유물들을 저에게 넘겨주었죠.

 

‘위안부’ 사진전 ©에카 힌드라티

‘위안부’용 의료기구 ©에카 힌드라티

 


Q. 비록 서면을 통한 인터뷰지만, 성실하게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앞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의 다양한 활동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국제적인 호응과 협력을 얻기 위한 ‘소녀상’ 설치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캠페인 전개 등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낍니다. 저도 이에 힘을 받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 대만, 미국, 독일, 일본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위안부’라는 공통의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죠.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 간의 협력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을 경험했던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상호 지원과 협력을 통해 일본 정부에 대한 압박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정치적으로 촉구하는 국제 운동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인도네시아 두 나라가 함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동 세미나 개최, 책자 발간, 영화 상영, 사진 전시회 등 다양한 협력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적으로 크게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데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과 현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한국의 다양하고 활발한 사회 운동은 큰 영향을 줄 수 있어요.

끝으로 인도네시아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참상을 한국에 계시는 여러분들에게 알릴 기회를 마련해 준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웹진 <결>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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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에카 힌드라티 (Eka Hindrati)

1975년 12월 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출생. 1999년부터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 연구 및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현재까지 인도네시아 전역에 거주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 여성 45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 이중 Internews 라디오에서 기자로 근무할 때 인도네시아 중부 자바, 욕야카르타에 거주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 마르디엠(Mardiyem) 할머니에 대한 일대기를 취재한 ‘위안부’ 문제를 인도네시아 언론 사상 최초로 전국 50개 라디오 방송사를 통해 알렸다. 2007년에는 고이치 기무라(Koichi Kimura) 박사와 함께 마르디엠의 일대기를 5년 동안 정리하여 『그들은 나를 ‘모모예’라고 불렀다』(Momoye Mereka Memanggilku)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이는 인도네시아 ‘위안부’를 다룬 최초의 책이 된다. 2009년에는 『일본 군국주의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전쟁 범죄』(Japanese Militarism & Its War Crimes in Asia Pacific Region)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고 ‘위안부’에 대한 세 번째 책으로 (가칭)『일본 군국주의 발 아래 자바 처녀들』(Nona Djawa Di bawah Telapak Kaki Militerisme Jepang)을 준비 중에 있다. 책 출간 이외에도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를 사회에 알리는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중부 자바, 솔로(Solo)에서 ‘위안부’ 사진전을 개최했고 2016년에는 자카르타에서 8명의 여성 화가들과 함께 ‘위안부’를 주제로 한 작품전을 열었다. 인도네시아 ‘위안부’ 문제에 대한 협력 체계를 강화하고 사회적 캠페인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2년 고이치 기무라 박사, 아누르라 사푸트라(Anugrah Saputra) 씨와 함께 인도네시아 ‘위안부’ 연대(JSII)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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