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연대를 발명하는 ‘팀(Team) 『풀』’ 이야기

이령경일본 릿쿄대학 겸임강사

  • 게시일2020.07.20
  • 최종수정일2020.07.31

​김금숙 작가의 『풀』


김금숙 작가의 『풀』(『Grass』 by Keum Suk Gendry-Kim)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옥선의 삶을 그린 그래픽 노블입니다. 한국에서는 2017년 8월 14일에 출간되었고 2018년에 프랑스어로, 다음 해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올해 2월 14일 출간 이후 약 5개월간 2,300부 이상 팔렸습니다. 한국처럼 일본도 2월 초부터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4월 7일부터는 주요 지역에 긴급사태 선언이 내려졌습니다. 지금은 긴급사태가 해제되었지만, 일상이 급격하게 바뀐 가운데 2월 21일 교도통신의 보도를 시작으로 6월 1일까지 11개의 언론사가 『풀』을 소개했으며 8개의 서평이 여러 매체에 실렸습니다. 3월에 예정되었던 『풀』 원화 전시나 나눔의 집 방문 기획 등은 모두 취소되었지만, 팬데믹의 일상 속에서도 『풀』이 일본 독자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풀』이 엮어준 네 사람의 인연

코로나19의 위협에도 『풀』의 높은 작품성과 '풀 한 포기를 전하려는' 진심은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은 쓰즈키 스미에(都築寿美枝)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스미에 씨는 일본 히로시마현의 체육 교사였습니다.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 선생님의 공개 증언이 세상에 나오자 그는 관련 신문 기사를 교재로 만들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994년 2월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만났습니다. 스미에 씨는 계속해서 피해자들을 만났고 자신이 만난 그들의 삶과 '위안부' 범죄의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정년퇴직 후에는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지금 그는 성공회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평화 운동과 인권 교육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풀』을 처음 읽은 스미에 씨는 ''위안부' 문제는 어렵다', '나와는 관계없는 과거의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일본의 젊은이들도 만화 『풀』이라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번역과 출판을 결심했습니다. 

이런 스미에 씨의 결심과 김금숙 작가를 이어준 사람은 강제숙 씨입니다. 강제숙 씨는 1990년대 초반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1995년부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원폭 피해자 지원과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해 왔으며 지금은 동남아시아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스미에 씨와 강제숙 씨는 1990년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현장에서 만난 오랜 동지입니다. 강제숙 씨는 『풀』에도 등장하는데, 김금숙 작가와 함께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이옥선의 삶을 찾아 중국으로 떠나는 모습이 책에 그려져 있습니다. 저는 대구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활동에서 강제숙 씨를 만났습니다. 시민모임 관련 행사에서 강제숙 씨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을 이어주는 든든한 통역자이자 길잡이였습니다. 

제가 스미에 씨를 만난 것도 그때였습니다. 90년대 후반 관부재판 지원을 위해 대구 시민모임을 방문한 스미에 씨와 함께 김분선, 이용수 선생님의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방문한 일본인에게 경계심을 풀지 않던 두 분이 나중에는 마음을 열고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위안소에서 배운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노래와 춤을 즐기셨지만 그렇게 오래 일본어를 말하고 군가를 부르는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피해자들에게 일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번역 불가능한 기억과 경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모두 듣기 위해 우리가 더 많은 준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동시에 가해국의 시민과 함께 하는 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그 시간을 함께한 스미에 씨가 저에게 『풀』을 함께 번역하자고 했습니다. 90년대 후반 대구에서 시작된 인연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



『풀』이 만든 새로운 연대의 장

2019년 8월 23일, 쓰즈키 스미에, 강제숙 씨와 함께 김금숙 작가를 만났습니다. 번역자로서 작가와 상의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끝낸 뒤 도란도란 밥을 먹는데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20년 전 '위안부' 피해자들이 맺어준 인연으로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고, 귀한 선물 같은 작품을 만나 번역이라는 공동 작업으로 새로운 연대를 이어가게 되었으니까요. 이 연대는 세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풀』의 일본어 출판은 처음부터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일본어 출판위원회 공동대표가 되어 준 이케다 에리코(池田恵理子)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을 위한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명예 관장과 오카하라 미치코(岡原美知子) 씨도 스미에 씨의 오랜 동지입니다. 미치코 씨는 히로시마현의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스미에 씨와는 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미치코 씨는 1993년에 열린 심포지엄 '제4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 진정한 화해를 바라며'에서 처음으로 피해자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당시 본명을 숨긴 채 증언한 한국의 피해자가 김복동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2016년이 되어서야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 미치코 씨는 한국, 중국, 필리핀의 피해자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여전히 안전하게만 사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을 계속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년퇴직 후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히로시마 네트워크'(2012년 4월 결성, 이하 히로시마 네트워크)의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히로시마 네트워크는 매달 첫 번째 수요일에 일본 히로시마 시내에서 시위를 엽니다. 지난 6월 27일에는 유엔이 정한 '분쟁 하 성폭력 철폐의 날(6월 19일)'을 맞아 인도네시아 피해자 관련 행사를 열었습니다. 

스미에 씨, 에리코 씨, 미치코 씨 세 명과 함께 출판사 고로카라(こらから)가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습니다. 2019년 9월 7일 시작된 모금은 4일 만에 목표액 145만 엔을 달성했습니다. 예상 밖의 호응이었습니다. 2차 모금도 순식간에 목표액을 달성했고 이후에도 응원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총 432명의 시민이 펀딩에 동참해준 덕분에 일본어판 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2020년 2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 후쿠야마에서 일본어판 『풀』 출판 기념 <김금숙 작가와의 만남>도 열 수 있었습니다. 지난 30년간 '위안부' 피해자들과 인연을 맺고 활동해 온 4개 지역의 시민들을 포함해, 히로시마에서는 원폭 문제 운동, 후쿠야마에서는 부락민 차별 문제 운동을 하는 시민들을 주축으로 행사가 열렸습니다. 21일 도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건물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 행사는 자료관의 스태프들과 대만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한 시바 요코(柴洋子)같은 활동가들 덕에 가능했습니다. 시바 씨는 『풀』의 배경이 되는 지역과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같고, 이옥선은 대만의 피해자와 다를 게 없다고 했습니다. 시바 씨 외에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오랜 시간 피해자 지원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은 이옥선과 함께 각지의 피해자들을 떠올렸습니다. 히로시마에서는 히로시마조선중고급학교 학생이 사회를 봤고, 후쿠야마에서도 고등학생이 사회를 봤습니다. 이 학생들에게 30년 '위안부' 운동의 바통이 넘겨질 것입니다. 

이 만남은 '위안부' 피해 역사를 뉴스로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역사와 제대로 대면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22일 오사카 행사의 공동 주최는 '다민족 공생 인권 교육센터'였습니다. 오사카에서의 행사장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쓰루하시에서 재일조선인 고령자 복지 시설 '바다'를 운영하면서 인권 운동을 하는 송정지 씨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그의 남편 김동휘 씨는 모국인 한국에서 유학하던 1975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북한의 간첩으로 조작된 국가폭력의 피해자입니다. 제가 재일한국인 조작 간첩 사건의 재심 재판을 지원, 연구하면서 만난 인연입니다. 당일 손님들을 맞이하고 열심히 책을 판 사람은 김오자 선생님을 비롯한 조작 간첩 피해자와 가족분들이셨습니다. 고문 수사관, 조작에 관여한 검찰, 사법부로부터 제대로 된 사죄를 받지 못한 조작 간첩 피해자들은 『풀』의 이옥선이 “일본놈들이 나빠, 아베가 사죄해야지, 배상해야지”라고 하는 원통함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오사카 행사의 뒤풀이 자리에는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했던 조작 간첩 사건 당사자들과 관계자, 지역에서 '위안부' 운동을 해온 분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풀』을 통해 국가 폭력과 인권을 다시 생각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에 전하는 30년 운동의 역사

『풀』의 그림은 단순함이 극대화된 흑과 백의 수묵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최대한 간결하게 묘사된 등장인물은 내가 되기도 하고, 붓 터치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바람, 비, 산, 나무, 나뭇잎, 풀, 새는 이옥선의 마음을 상상하게 합니다. 김금숙 작가가 그려낸 위안소에서의 직접적인 폭력은 누군가가 배당받았을 군화, 검은 묵으로 채운 3쪽 18칸의 어둠, 그리고 뼈마디 굵고 거친 이옥선의 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방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검은 여백 속에 배인 짐승 같은 울부짖음, 평생 이옥선이 안고 온 고통의 깊이는 독자가 상상해 내야 합니다. 이 책을 읽는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은 남영동, 서빙고의 몇 호실을 떠올리고, 지원자들은 피를 토하듯 생존자들이 남긴 증언을 떠올립니다. 『풀』에는 식민지 조선에서 딸로 태어나 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옥선이, 전쟁이 끝나고도 여성이자 성폭력 피해자로서 겪어야 했던 구조적 폭력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풀』의 특별한 점은 작가가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열심히 작품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든 『풀』 속의 '나'는 이옥선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거듭합니다. 작가는 엄마 배에서 나와 여태껏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이옥선을, 형제끼리 의지하며 살려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는데 뭣 하러 왔나 싶다는 이옥선을, 폭 안아드릴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대신에 작가는 15살 옥선이 걸었을 중국 연길의 거리를 걸으며 공기를 느끼고, 연길 동 비행장에서 서시장을 지나 위안소였던 건물의 복도에 섭니다. 『풀』 속의 작가를 따라 이옥선과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자는 이옥선의 삶으로 대변되는 역사와 내가 사는 오늘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잔혹한 폭력의 실상, 70여 년 전의 과거사, 일본에 대한 증오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옥선은 어떻게 살고 싶었던 존재였을까?', '나는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우리 사회는 괜찮은가?' 자문하게 됩니다. 피해자가 부재하는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풀』은 소중한 작품입니다.

해외에서도 『풀』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2019 미국 뉴욕타임스 최고의 만화', '2019 영국 가디언 최고의 그래픽 노블'에 선정되었고, '프랑스 휴머니티 만화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지난 6월에는 만화계 시상식 중 가장 영예로운 '아이스너 어워드' 3개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랐습니다. 

일본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지금 한국에서도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움직임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과 당당히 맞서왔고 지금도 맞서고 있는 각국의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와 지원 운동을 해 온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옥선들'의 삶으로 대변되는 참담한 역사로 '모험'을 떠나는 시민들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팔린 2,300여 권의 『풀』은 역사를 지우려는 힘에 맞서고자 하는 누군가의 손에 전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국경을 넘은 '위안부' 운동 30년 역사가 계속됩니다.

글쓴이 이령경

일본 릿쿄대학 겸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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