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세이]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박소연

  • 게시일2021.11.01
  • 최종수정일2022.11.25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의 가능성이 차단된 시대, <결>은 이에 대한 갈증을 글로나마 풀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는 일제 침탈과 일본군‘위안부’관련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을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서울, 통영, 천안, 대구, 제주 등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다섯 지역을 따라가며, 꼭 기억해야 하지만 쉬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행에세이] 2021 평화로드
1. 서울편 - “기억의 길”을 걷다 –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와 기림비
2. 통영편 - 아름다운 항구, 통영에 자리한 아픈 역사의 길을 걷다
3. 천안편 -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 잠든 당신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4. 대구편 - 희움일본군‘위안부’역사관으로 떠나는 근대문화거리 투어
5. 제주편 -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한다–전쟁과 일본군‘위안부’, 그리고 제주도
추천코스
성산 일출봉(제주 일출봉 해안 일제 동굴진지) - 성산 위안소 터 - 모슬포(알뜨르 비행장) - 섯알오름 - 백조일손지묘 

 

#제주도와 나

대학교에 입학하던 2018년, 갓 20살이 되었던 나에게 제주는 ‘평화의 섬’ 이미지가 강했다. 휴양을 즐기러 오는 관광객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넓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은 볼 때마다 아름답고 새로웠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나는 단순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평화나비’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제주평화나비 활동은 단순히 피해자를 돕는 단체가 아니었다. 제주평화나비 활동을 통해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넘어 왜 우리가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평화의 섬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제주에 어떤 역사적 아픔이 있는지, 현재는 또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역사 기행과 이번 답사를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직접 보고 만난 제주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결7호 작전과 제주도

태평양 전쟁 말, 패망을 앞둔 일제는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결7호 작전을 준비했다. 그중 6개의 결전지는 일본 본토에 있었고, 마지막 최후 결전의 장은 제주도였다. 이에 일제는 제주도를 완벽한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하기 위해 제주 전역에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그리고 군사시설 건립에는 제주도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강제 징용돼 흙 운반 일을 하다가 도로꼬(궤도차)에 깔려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있다.”[1]
 

이는 알뜨르 비행장 확장공사에 징용된 김웅길 씨의 증언이다. 그의 증언처럼 당시 강제로 동원된 주민들은 굶주리고 매질을 당하는 등 반인권적 취급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주민들의 희생으로 제주 곳곳에 각종 군사시설이 설치되었고, 아직도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전히 아름다운 해안가에, 그리고 각종 오름에 존재하는 일제 동굴기지들이 전쟁의 잔인함을 보여준다. 

만약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불바다가 됐을 수도 있는 평화의 섬, 제주도의 역사를 따라 가보려 한다.

#성산일출봉 일제 동굴진지와 성산위안소 
#과거 일제 강점기로 돌아가 보기

흔히 알려진 것처럼, 성산일출봉은 제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한 번쯤 방문할 만한 관광지이다. 나도 성산일출봉 위에 올라가 제주의 풍경을 감상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번 답사에서는 관광객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자리해 온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마주했다. 

‘제주 일출봉 해안 일제 동굴진지’는 다른 동굴에 비해 접근이 쉬운 편이었으나, 일반 여행객들이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동굴로 통하는 길이 어딘지 한참을 둘러보다가 마을 주민들이 이용하는 해안가를 통해 진지동굴에 가까이 가봤다. 멀리서 봐도 동굴의 모습이 대략 보였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성산일출봉 동굴기지 안내문 ⓒ제주평화나비 박소연


동굴진지에 관한 표지판 설명에 따르면, 성산일출봉 동굴진지는 연합군이 성산포 해안으로 상륙할 경우를 대비해 만든 자살특공부대 시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그 동굴 안에는 자살 폭파 공격을 위한 소형선박이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런 동굴이 성산일출봉 동쪽 해안절벽을 따라 무려 18개나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산일출봉 동굴기지 ⓒ제주평화나비 박소연


그러나 바닷가로 나가지 않는 이상 18개의 모든 동굴진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고, 내가 있던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동굴은 겨우 3개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시 강제 동원된 주민들의 고된 노역과 전쟁에 대한 일제의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성산일출봉 일제 동굴진지로부터 대략 2~3분을 걸어가면 성산위안소 터가 나온다. 2019년 제주평화나비에서 갔던 ‘성산리 일본군 위안소 공개 기자회견’ 이후 첫 방문이다. ‘제주에 위안소라니’라는 마음으로 간 기자회견장에서 오시종(성산리 주민) 님의 증언을 들으며 참 많은 감정이 스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시종 님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해주셨다. 자살 공격을 감행할 자폭 병기의 조종사였던 요카렌[2] 생도들이 주로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것부터, 30년 뒤 위안소에서 목격했던 여성을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가 제주어를 사용했다는 것, 그리고 여성들이 하루에 2~6명 정도의 요카렌을 상대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까지 모두 말씀해주셨다. 

오시종 님이 증언한 성산위안소 터 ⓒ제주평화나비 박소연


성산위안소 터에 처음 갔을 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터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놀랐다. 심지어 공터는 주변 식당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흔한 장소가 알고 보니 성산위안소 터였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역사적 가치가 생긴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가 숨겨져 있는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총 240명이다. 하지만 그중 제주도 출신 피해자는 한 분도 안 계신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본군‘위안부’문제만 봐도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임을 고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섬이라는 환경, 고립된 제주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피해자임을 고백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오시종 님이 위안소에서 목격했다던 그 여성 또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숨긴 채 여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아직 제주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할 수는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충분히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채 모슬포로 향했다. 

#알뜨르 비행장, 섯알오름, 백조일손지묘 
#반복되는 역사

일제는 제주도 내에 동굴진지뿐만 아니라 비행장도 총 다섯 군데에 설치했는데, 그중 하나가 대정읍 모슬포에 있는 알뜨르 비행장이다. ‘알뜨르’는 ‘마을 아래 있는 넓은 들’이라는 뜻의 제주어로, 알뜨르 비행장 근처에 가니 실제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곳곳에는 관제탑과 지하벙커 등 전쟁의 잔해들이 남아있었다. 

알뜨르 비행장에 여전히 남아있는 관제탑 ⓒ제주평화나비 박소연


그중에서도 특히 비행기 격납고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지어진 모습과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풀로 위장한 모습, 그리고 격납고 내부에 전시된 전투기 모양의 작품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비행기 격납고와 전투기 ‘제로센’을 형상화한 전시 ⓒ제주평화나비 박소연


격납고 내부에 전시된 작품은 태평양 전쟁에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투기 ‘제로센’을 똑같이 형상화한 것인데, 방문객들의 평화의 메시지가 담긴 리본들로 휘감겨 있었다. 마치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 합쳐져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비행기 격납고 입구에는 격납고에 대한 설명을 만화로 풀어놓은 표지판이 있는데, 그 표지판에는 격납고가 6.25 전쟁 당시 미군기지로 사용됐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모슬포 주민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격납고가 결국 전쟁에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군사기지화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섯알오름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섯알오름은 글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곳이다. 그만큼 섯알오름은 제주가 겪은 아픈 역사의 흔적들을 잘 머금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되도록 직접 방문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일제 탄약고 터이자 섯알오름 한국전쟁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및 제단 ⓒ제주평화나비 박소연


알뜨르 비행장에서 멀지 않은 섯알오름에 도착했을 때, 일제가 탄약고로 사용했던 터이자,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및 제단이 그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섯알오름은 일제가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구축한 제주도 내 최대의 탄약고였고, 탄약고 위 오름 정상에는 일제가 항공기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고사포 진지가 있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하면서 탄약고는 미군에 의해 폭파되었고, 그 폭파 과정에서 큰 웅덩이가 생겼다. 그리고 그곳은 훗날 6.25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자 집단 학살 터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4.3사건으로 인해 ‘레드 아일랜드’로 찍힌 제주도 안에서 법적인 절차 없이 예비검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이들까지 모두 예비검속자로 끌려갔다. 

그리고 1950년 8월 20일 새벽 4~5시경, 모슬포경찰서 관내에 예비검속된 252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새벽 트럭에 실려져 섯알오름으로 향하는 길, 그들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리고자 했고, 트럭 이동 중에 자신이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던졌다. 군인들에 의해 희생자들의 유품은 불태워졌지만, 당일 새벽 길 위에 흩어져있는 고무신을 보고 쫓아온 유족들에 의해 현장이 발견되었다.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군경은 6년이 지나도록 출입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시신 수습을 허가받았을 때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에 유족들은 한 날, 한 시, 한 곳에서 돌아가신 희생자들의 시신을 모아 한 곳에 모셨다. 그리고 ‘조상이 각기 다른 일백서른 두 자손이 한 날, 한 시에 죽어 하나의 뼈로 엉키어 하나의 자손으로 환생하시라’는 의미를 담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는 비석을 세웠다. 
 
스산한 분위기의 ‘사계리 공동묘지’를 지나 희생자분들이 모셔져 있는 ‘백조일손지묘’로 가는 길, 6.25 전사자 충혼비가 보였다.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의도치 않게 또 만나게 되었다. 백조일손지묘에 도착해, 입구에 설치된 표지판의 설명문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백조일손지묘 안내문 ⓒ제주평화나비 박소연


오래돼 보이는 표지판을 읽으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당시 나보다 어리거나 내 또래의 사람들이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됐다는 것이었다. 희생자 대부분의 나이가 10대에서 30대 사이였고, 유족의 대부분이 희생자의 부모였다. 4.3을 거치며 ‘레드 아일랜드’로 낙인이 찍힌 제주도에서 6년 동안 자식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을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지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분노가 일었다.

5.16 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묘비 조각이 전시된 것을 보고는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전쟁이, 국가 권력이 도대체 뭐길래 제주의 역사는 이토록 끊임없이 아파야만 했는지…. 애틋한 마음이 들면서 화가 났다. 

알뜨르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된 모슬포 주민, 일제와의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타국의 피해자들, 6.25 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집단학살 희생자와 제주 4.3 피해자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모두 공통점이 있다. 전쟁과 폭력 상황에서 약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총구는 늘 약자를 향하기 마련이다.

#잊는다는 것의 결과

여기까지 제주에서의 다크투어 여정은 마무리된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제주도로 향하는 여행객들의 설레는 발걸음을 이어주는 제주공항은 사실 일제가 제주 내에 설치한 또 다른 비행장이자, 4.3 당시 최대의 학살 터인 정뜨르 비행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공항이라는 특성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당시 많은 학살이 이뤄졌고, 희생자들의 시신은 바로 수습되지 못했다. 넓게 펼쳐진 활주로 밑, 4.3의 아픔이 묻혀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수십 년간 진행해온 수요시위에서 늘 재발 방지를 외쳐왔다. 다시는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군사기지화와 가부장제의 구조 속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전시 성폭력 문제는 언제 어디서든 반복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내전 중인 국가에서는 여전히 전시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평화를 외치는 이유이자, 일제에 의한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를 후에 미군들이 사용한 것처럼. 일제 군사시설이 위치한 섯알오름이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자 학살 터가 된 것처럼. 제주에서 국가에 의한 또 다른 군사기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강정해군기지). 그렇기에 역사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을 넘어 모두가 평화를 위해 행동하고 함께 하는 미래를 그려본다.

 

각주

  1. ^ "제주는 거대한 군함도였다" 도민 4만명 일제 군사요새 강제노역, 연합뉴스, 고성식, 2017.08.14.
  2. ^ よかれん(予科練).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의 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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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소연

제주평화나비(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제주에서 활동하는 청년 네트워크 단체) 소속. 제주대학교 언론홍보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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